우리 삼남매의 결혼식은 참 달랐다. 오빠는 그래도 아빠의 사업이 잘 될 무렵이어서 큰 올케가 받은 폐물은 아마도 왠만한 집 부럽지 않았을 게다. 엄마는 자신이 제대로 폐물을 받지 못하고 결혼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는지 나와 이모가 이상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큰 올케에게 해 주었다. 그 때는 친정아버지와 엄마 모두 건강하시고 젊으셨을 때이다. 그리고 5년후 내 결혼식 때에는 친정아버지는 중풍이 생기신 후 물리치료 덕택에 한 쪽에 지팡이를 짚으신 채 걸으실 수는 있었지만 식장에 나를 데리고 들어가실 수는 없어서 이모부가 대신 그 역할을 하셨다. 엄마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 결혼이 그리 탐탁치 않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시댁에서 받은 만큼 해 주겠다고 하셨고 나도 별로 기대한 바가 없어서 정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남동생의 결혼식때는 그 당시 우리 사정으로서는 최선으로 둘째올케에게도 해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1년이 채 안되어서였는데 아버지 손도 못잡고 들어간 내 결혼 때는 그런 말씀 한 마디 없으시더니 아버지 없이 하는 결혼에 흠잡히면 안 된다고 동생 결혼식 때는 몇 배는 더 신경을 쓰시는 눈치셨다.
언젠가 내가 내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 친구가 그랬었다.
"엄마가 아마도 너를 믿어서 그러셨을 거야. 아들들은 흠잡힐까 봐 더 챙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해야 네 마음이 편하쟎아"
아마도 나는 엄마가 바랬던 딸의 모습이 아니었나 보다. 아니 엄마가 생가했던 여자가 아니었나 보다.
어려서부터 유독 따지기 좋아하고 돈 아껴쓰고 엄마에게 아이답지 않게 옳은 말 해대고 고집 센 내게 아마도 엄마는 정이 가지 않았을 게다. 엄마는 손이 커서 쇠고기를 사도 몇 근씩 사서 냉장고에 가득 채워 놓아야 하는 사람인데 나는 결혼을 해서 살면서도 쓸 만큼 사서 그 때 그 때 쓰고 필요할 때 또 사는 편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결혼하고 우리 집에서 이삼일 있다 가면서 꼭 불평을 했다.
"내가 이 집에 있다가는 들피나서 죽겠다."
"엄마 도대체 왜 그래? 우리 남편이랑 딸아이는 아무 불평이 없는데..."
오빠가 큰 올케와 지금은 갈라섰지만 아마도 큰 올케처럼 손 큰 사람이 아니면 엄마는 오빠내외와 그렇게 오랜기간 동안 못 살았을 게다. 아마 엄마가 내 시어머니였으면 나와는 단 몇 달도 못 살아냈을 게다. 나는 내 상황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살고 있는데 엄마눈에는 아마도 그게 내 자신과 자기가족만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엄마발인 전날밤 오빠는 엄마가 자기네 부부생활에 많은 관여를 해서 큰올케가 불평이 많았다고 털어놓았었다. 해 주고도 자신이 해 준만큼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이 엄마였다. 몸과 마음 가득히 불을 품고 사는 사람같았다.
나는 장례를 치룬 후 매일마다 엄마의 영혼이 정말 편안한 곳에서 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게 이 세상에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화해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후 나는 앞으로 일년간은 지나온 시간을 잊겠노라고 결심하며 꼭 필요한 일 외에는 한국에는 연락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저 조용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내 나이 20대부터 나는 이상하게도 빨리 나이먹어 푸른 잔디밭이 보이는 거실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따뜻한 무릎덮개 덮고 앉아 쉴 수 있는 여유를 끊임없이 그리워했다. 세상 사람의 분류에는 공격형과 개혁형과 운둔형과 순응형 등이 있다는데 나는 천성적으로 운둔형기질을 조금은 타고 났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