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은우. 그를 만난 건 역시 산이었다. 지금처럼 하얗게 눈이 내린 겨울 산이었다. 온통 세상은 은빛에 취해 있었다. 눈은 구태여 언어를 수단으로 삼지 않아도 세상과 세상사이에 난 간격을 좁히기에 충분했다.사지를 벌려 온전히 눈과 합일된 나무들. 인선과 은우도 그렇게 서스럼없이 서로를 받아들였었다. 그해 겨울, 인선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그리고 둘은 그 산아래 발치에서 여름을 났고 그리고 또 다시 겨울을 보냈다.
찻집 '좋은터'는 은우와 인선이 산을 내려와 농가를 개조해 지은 집이었다.
인선은 차를 끓였다. 구기자,칡, 오미자, 인삼,당귀..., 그녀가 끓여 낸 차를 은우는 무척 좋아했다. 인선처럼 차맛을 잘 우려내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은우는 말했다. 인선은 날마다 은우를 위해 차를 끓였다. 그것이 은우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은우는 인선에게 한지였다. 산안개 같은 한지였다. 모든 것을 품은듯 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 그러나 모든 것을 정하게 걸러 내어 무엇이라도 따스하게 품어 안을 것만 같은 한지였다.그랬다. 은우는 인선에게 그런 존재였다.
은우는 산사람이었다. 바람이 맨몸을 가로지르는 바람난 들.은우에게 들은 숨막히는 사자의 우리에 불과했다.은우를 가두는 들. 어쩌면 그 들은 인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선은 그런 생각이 들때면 건너지 말았어야 했을 강을 건넌 사람처럼 넋을 잃었다. 그리고 어둠이 농가를 순식간에 침몰시킬때까지 무릎을 꺾고 석고 상처럼 앉아있었다.그때는 은우가 이미 산으로 사라져버린 뒤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은우와 인선은 서로에게 길들여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