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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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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khl7137 2002-12-11


...웃는 얼굴로 영이 내 앞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고 그 다음에는 안심이 되었고 그리고...안쓰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영은 나를 끌고 커피숍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커피를 주문하고 내 앞에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학이 가득 담긴 유리병이었다.

[심심해서 접어봤어]

나는 아무런 말없이 유리병을 옆으로 치우고 영을 응시했다. 화장을 했다. 짙게 말이다. 이제껏 영은 화장을 해도 티나지 않게 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눈썹을 짙게 그리고 아이라인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입술은 빨갛게 칠했다. 귀도 뚫었다. 왼쪽에는 고양이를 오른쪽에는 별모양을...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변화를 줘봤어]
[두번 변화 줬다간 애 잡겠다 누구 아이디어야 너? 아님 주희?]

영은 싱긋 웃으며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탔고 나는 블랙을 마셨다.
[그 자식 나쁜 자식이야 상우보다 더]

영과 형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형의 부인이라는 여자가 영의 집에 전화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형의 부인이 영과의 만남을 원했고 영은 믿을 수 없다며 나갔다. 형의 부인은 미인이었다. 차분하고 다소곳한게 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자였단다. 무언가 묻기도 전에 여자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고 영은 그것이 등본이라는 것과 형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걸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믿어지지 않죠?]
여자의 음성은 차갑지도 않고 담담하지도 않았다. 동정심이 묻어 있었다. 영은 형의 이름만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등본까지 보여주는 이유는 아가씨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솔직히 몇번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이는 방랑벽이 있는데다 어린여자를 좋아해요 어린 여자애들 눈에 그이는 멋있어 보이니까...음악을 하고 돈을 잘 쓰니깐. 처음 이런 일 당했을 땐 분하고 억울해서 이혼까지 생각했어요. 용서를 빌길래 봐주었는데 그 시기가 지나니깐 또 그러더군요 두세번 겪고 나니깐 무덤덤해졌어요 그리고 그이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예요
[거짓말...]
여자는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이혼하지 않는 줄 알아요? 그이가 좋아서요? 아니요 그럼 미워서? 아니에요 애들때문에? 천만에요 우린 애도 없어요 결혼한지 7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말이죠.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돈 때문이예요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다는 거, 그 하나만이 유일한 낙이고 이유에요 속물이라고 해도 좋아요 난 돈때문에 그이는 자신의 응석을 받아주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 나 외에는 없다는 걸 알기에 이혼을 않는 거예요 요즘 연락이 안되죠? 아가씨에게 싫증이 났다는 증거죠 서른셋에 스무살의 아가씨는 너무 젊어요 그이가 나이도 속였을 거예요]

그랬다. 형은 스물 일곱살이라고 했다. 또 그렇게 보였고...

[잊어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더구나 아가씨는 너무 젊어요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해요]

지독해도 너무 지독한 현실이고 배신이었다. 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남자에게 받은 배신은 한번으로도 충분히 지옥이었다.

[아줌마 나한테 사기치지마 안 믿어 형을 만나게 해줘요]
[만나지 않을 거에요 책임질 사람이 아니니깐...따라와요 믿게 해주죠]

영은 여자를 따라 아파트로 갔다. 벽면에 걸린 커다란 결혼 사진에서 형이,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형이 행복에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머리속이 띵.했다. 가슴속 사랑이 감정이 갈갈이 찢어지는 걸 영은 속수무책 지켜보았다. 눈물은 영의 의지와 상관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영은 몸을 돌려야만 했다.

[미안해요 아가씨 좀더 빨리 알았더라면...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확인한 건 아가씨 뿐이에요 그이를 정말...사랑한 모양이군요 미안해요]

영의 여자의 머리끄뎅이라도 잡고 싶었다. 아님 여자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 뜯던지...가슴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영은 엘리베이트안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을 움켜 잡았다. 입술을 물어 찢었는지 피맛이 났다.
형과 자주 갔던 여관으로 간 영은 자살을 생각했다. 면도날을 손목에 댔다. 피가 났다. 차마 깊이 그을 용기가 없었다. 손마디마디를 그어 피를 냈다. 마음이 안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그제야 미친 듯이 울었다.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곡을 했다.

[이틀을 여관에서 지냈어]

내가 눈물이 났다. 남자 볼줄 모르는 영의 어리석음에 화났고 영의 순수 사랑을 이용하는 남자라는 인간에 화가 났다.

[잊으라고?...여자한테 첫 남자는 영원한 그리움이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미움의 대상으로 남지도 않아]

의외로 영은 형이란 남자에게 관대했다. 그리고 반대로 아버지에 대한 영의 미움은 더해졌고 급기야 주희 집으로 짐을 옮기는 걸로 완전히 외면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영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다.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서다. 처음으로 나는 두려움이란 걸 느꼈다. 당사자인 영은 오히려 담담한 얼굴로 잡지책을 뒤적였지만 나는 안절부절했다. 웃으며 수술실로 들어간 영은 회복실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누워 있었고 나는 미친년 미친년 이라는 소리만 계속 되뇌였다.

[다시는...다시는 사랑따윈 하지 않을거다 즐기면서 살거야]

자신에게 찾아온 생명을 무참히 지우고 나오면서 영이 한 말이었다. 장담하지 말랬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지 말라고 내가 그랬다.

영은 한동안 사랑을 접었다. 남자들을 쉽게 만나고 쉽게 이별을 고했다. 바로 내가 염려한 일이었다. 주희와 둘이 서로 소개 시켜주고 소개 받으면서 그렇게 남자에 대한 배신을 남자에게 풀고 있었다. 직장 또한 여러 곳을 바꾸고 심지어 주희와 더불어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나는 주희가 문제라는 걸 알았으나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주희는 영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가까이 있었다. 나보다 주희에 대한 애정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고 영과 나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