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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BY khl7137 2002-12-08


형이란 사람의 이름외에 영이 그에 대해 확실히 아는 건 없었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냐고 물었을 때 영은 씨익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나는 불안했다. 영에 대한 나의 예감은 아직까지 틀려본적이 없었다는 게 나를 또다시 불안하게 했다.

형과 영의 관계가 반년을 넘어서길래 나는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했다. 괜한 나의 기우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게 아닌가...
영에 대한 불안을 일단 접고 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도서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태민 또한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는데 가끔 태민은 내 자리에 커피를 갖다 놓곤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자 학교는 방학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학교에 머물렀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친구는 두어명 있었으나 나와 마찬가지로 오후나 오전, 아르바이트로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어 여전히 나는 외톨이같은 신세를 면치못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날,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도서관으로 향한 나는 태민과 함께 있는 영을 발견했다. 둘은 마치 다정한 연인마냥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한 영이 손짓을 했다. 태민은 웃으며 아는 척을 했고 평소처럼 나는 무시했다.

[왠일이야?]
[너 말고 나 만나러 왔대]
태민이 대신 대답했다.
[이 시간에?]
난 영을 향해 계속 물었다.
[하여튼 시간 개념이 없어 오늘 토요일이야 오전 근무잖아]
[그럼 데이트나 하지]
[데이트는 데이트고...나도 대학생들이랑 미팅 좀 하자]
[니 애인알면 퍽도 좋아하겠다]
[태민이가 다음 주 토요일에 미팅하재 너도 포함해서]
[나를 왜 끼워]
나는 태민에게 화를 냈다.
[니 친구들이라면 사양하겠어 난 안 해]
[하여튼 기집애가 앙칼지긴...찬바람이 쌩쌩 돌다 못해 얼어 붙겠다]
[그게 매력이잖아]
태민의 말에 나는 노려보았고 영은 맞다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나 말고 니 매력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차에 올라 타는 영에게 나는 왜 태민같은 애들과 어울리려고 하느냐고 짜증스레 물었다. 한번 당하고도 그러냐고... 영의 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태민이 쟤 괜찮은 녀석이야 상우와 같은 종으로 보지마 언제든가 태민이 쟤가 그러더라 상우, 괜찮은 앤데 별명이 여자 킬러니 조심해서 나쁠거 없다고. 그리고 상우한테서 내 얘기 듣고는 한방 먹였댄다 재밌지? 요즘은 뭐하는지 모른대 걔 너한테 관심있어 하더라 간다]

영의 말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미팅에 참여했고 파트너는 묘하게도 태민이었다. 주희와 영은 파트너를 데리고 사라졌고 태민과 나는 학교에 남아 자판기 커피나 마셨다. 갑자기 태민의 존재가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해 나는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다.

영은 가끔 미팅한 남자와 만난다고 했다. 형이 알면 좋지 않다고 충고를 했는데도 스릴있다며 웃기만 했다.

아르바이트에 리포트에 정신없던 나는 잠시 영을 잊고 지냈다. 개강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서야 나는 영과의 연락이 뜸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싶어 회사로 전화를 했더니 관뒀다는 말만 남겼다. 집으로 전화를 하자 엄마가 주희와 같이 있다며 전화 번호를 알려 주었다. 받지 않았다.
이주일쯤 지났을까 집으로 작은 소포가 왔다. 녹음 테입이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도 남았다.

아주 매력적인 여명의 허스키한 저음 음성이 들려왔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9월을 기억하세요
when life was slow and oh. so mellow 인생에 여유가 있고 달콤하던 때를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9월을 기억하세요
when grass was green and grain was yellow
풀잎은 푸르고 곡식은 누렇게 여물었던 때를
.............

테입 앞뒤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나는 또 밤새도록 듣다 잠이 들었다. 이번엔 쪽지도 있었다.

[진아 나의 사랑하는 두번째 마누라. 걱정하지 말고 지내 며칠 머리 식히다 전화할께]

영의 실연과 더불어 내 주위를 맴돌던 태민이 휴학계를 냈다. 영장이 나왔단다. 군대를 간단다. 무언가 허전하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하고...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교정 벤치에 앉아 가을의 스산함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태민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내밀었다. 앉아도 되느냐고 바보같이 묻는 태민에게 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가 옆에 앉았다.
[가을 향기 맡아져?]내가 물었고 태민은 놀라는 것 같았다.
[......!]
[몹시 외롭고도 달콤한 게 가을의 향기인 것 같아. 중독처럼 가을에 취하게 돼 눈물이 날것도 같고 시인이 될 것도 같고 우울한 환자가 될 것도 같고...가을은 위대한 최면술사야]
[...그렇구나]
태민은 간단하면서도 깊이 있게 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내가 다시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군대간다며?]
[...음]
[...잘가라]
[...음] 또 침묵이 한참 흐른 후 이번에는 태민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그렇게 싫으냐?]
[...대답하기 싫은데]
[아니면 내가 상우의 친구라는 게 싫은거냐?]
[...아마 그럴지도...]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상우와 난 친하지 않았어. 고등학교때 같은 서클부라 어울렸는데 여자 친구도 없는 내가 불쌍하다며 끌고 간 자리가 네가 있는 자리였어. 내키지 않았어. 상우의 여자 편력은 알아줬거든. 소개시켜준다고 해도 기대하지 않았어. 상우의 여자 친구 친구면 그렇고 그렇겠지 라고 생각했으니깐]

태민은 진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책만 열심히 읽는 모습이 의외였다. 진에 대한 호기심이 관심으로 변했고 왠지 놓치고 싶지 않아 상우를 따라 다녔다. 그런데 상우가 영과 헤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놀란 태민이 영의 전화 번호를 물었으나 상우는 코웃음만 쳤다.

[그런데 대학에서 널 다시 만난거야. 반갑더라. 어떡하든 네 소식 알고 싶었거든]
태민은 피식 웃었다.
[난 상우와 다르다는 걸 너에게 알게 해 주고 싶었는데 넌 나를 거들떠도 안 보더라 사실 그때도 상우 따라 다닌 건 니가 마음에 들어서였어. 사귀고 싶었거든]
놀라서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태민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빤히 나를 보았다.
[군대 가면 너한테 편지 같은 거 소식 같은 거 전하지 않을거다 대신...나 한 태민을 잊지만은 말아줘. 제대하면 제일 먼저 널 찾을거다]

태민의 말은 며칠내내 내 머리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태민이 군대 가던 날 영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빵모자를 쓰고 가방을 어깨에 가로질러 매고는... 웃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