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만나야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고. 그러나 굳이 만나지 말아야 할, 만나서는 안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가끔 만나야 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희경은 그 남자, 민규를 만난 걸 불운이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처음부터 인연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사랑에 대한 불신도 이별의 아픔도 재회의 쓰라림도 모르고 살았을지도...!그럴까? 사람 사는 일이란 모르는 법인데...
민규와의 우연이 있은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 일주일을 희경은 밤이면 가요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밤 열한시에 가게문을 닫고 건물 지하 가요방에서 혼자 노래를 불렀다. <THE ROSE>. 그와의 사랑이 무참히 깨져버린 날 흐르는 눈물과 함께 많이도 불렀던 노래였다. 희경은 민규라는 그 인간이 아직도 자신에게서 감정을 꺼집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고 서글펐다. 아직도 그가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사랑했던가! 아니, 그런 감정이 있었던가? 민규가 정아에게 버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이렇게 혼란스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었다.
희경은 리모콘으로 취소를 눌렀다. 음악으로 울려퍼지던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화면에는 비키니 입은 긴 머리 여자가 엉덩이를 흔들며 요사스런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두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망설이던 희경은 은영에게 전화를 넣어 보았다. 세 번 울리고 받지 않으면, 혹시 은영의 남편이 받으면 그냥 끊을 요량으로 말이다. 그런데 두 번만에 은영이 받았다.
십분도 안되서 은영이 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 섰다. 하긴 은영의 집은 책방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니깐.
[전화를 받지 않더라니... 청승맞게 혼자 노래를 부르냐?]
[신랑은?]
[한 번 안아줬더니 쭉 뻗어서 자. 너한테 간다고 얘기했으니깐 급하면 전화오겠지. 우리 남편, 너라면 믿잖냐.]
[내가 사촌 동생이니깐 가능하지.]
은영은 낄낄거렸다.
[술 한 잔 하자.]희경이 먼저 청했다. 술이 그리웠다. 오늘밤은 취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비뚤어지게 한 번 마셔보자.]
희경은 책방문을 다시 열었다. 바깥에선 볼 수 없게 블라인드를 치고 크게 한 상 차렸다.
[이제 얘기해봐. 너 이러는 거 근래엔 없었어. 그 놈의 존재가 아직도 이 정도야?]
뜸들일 필요도 없이 은영은 하고픈 말을 했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니 잊을수야 없겠지만 이미 세월이 흐를만큼 흘렀고 무딜때도 됐건만...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보여서 그래.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렇게 그를 보았다는 게...]
[꽃단장하고 본들 달라질 게 있어? 또 초라하긴 뭘? 초라한걸로 따지면 그 놈이지. 널 버리고 다른 여자 선택했지만 그 여자한테 보기좋게 차였잖아. 아마 널 보기가 민망했을거다. 여자 가슴에 못박고 잘 되는 놈 있음 나와 보라 그래.]
희경은 대꾸없이 술을 마셨다. 주량이야 소주 한 병이면 딱 인데 음미하며 마실 수 있는 맥주를 택했다. 은영은 계속해서 민규에 대해 험담을 늘어 놓고 있었지만 희경의 귀에는 그저 주절주절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머리속은 많은 것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느슨하게 한 길을 가던 실이 갑자기 방향을 잃어 이쪽 저쪽 마구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가 맥주잔은 쉽게도 비워지고 채워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가끔 술이 맛있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희경은 저도모르게 픽.하고 웃었다. 그 때였다. 전화가 울린 건.
[어? 한시가 넘었는데 누구지...우리 신랑인가?]
수화기를 은영이 들었다.
[희경...씨요?...잠깐만요.]
수화기를 희경에게 건네며 은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 시간에 널 찾는 남자가 있어? 내가 모르는 남자가 있었니?]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희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화번호...어떻게 알았죠?]예상외로 침착한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건 오히려 희경이었다. 3년동안 그와 사귀면서도 깍듯이 존대한 적이 없던 희경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있어 이제는 완전한 타인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미안합니다 전 할 얘기가 없군요. 끊을게요.]
단호하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희경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조금이나마 그에게 복수한 기분이 들어서인지 통쾌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바로 뒤를 잇는 성숙하지 못한 감정에 후회를 했다. 질투하는 어린 여학생같은 꼴을 보였다는 어리석음. 그러나 이미 늦었다.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술기운이 싸악. 가시고 도로 정신이 멀쩡해졌다.
[그 놈이야? 미친 거 아니니? 무슨 베짱으로 전화를! 아니, 전화번호를 또 어떻게 알고?]
[나 혼자 있고 싶어.] [희경아...!] [미안해...]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은영을 확인하고 희경은 가게안의 불을 껐다. 한 쪽 통로의 책장을 밀자 공간이 생겼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희경이 생활하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희경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섰다.
민규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경찰이니 전화번호 알아내는 건 우스웠겠지...그의 목소리. 쓸쓸함과 그리움과 고통이 묘하게 묻어났다. 그리고 8년의 세월도 안고 있었다. 최소한 희경이 사랑한 그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도 변한건가...
깊고 떨리는 숨소리가 고요함속에 울렸다. 드문드문 차들이 불빛을 밝히며 지나가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아래 은행잎은 외롭고 추워 보였다. 그 아래 주차된 차 옆에 한 남자가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무심히 보던 희경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길게 담배 연기를 내붐고 있는 남자는 분명, 민규. 그였다. 희경은 한쪽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그는 희경이 있는 곳을 보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서서 담배 연기만 날리고 있었다.
왜 온 거야! 뭐하러 여기가지...!
그는 지쳐 보이고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희경은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보기 싫은 듯 희경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다시 마주하기엔 시간이 너무도 많이 흘렀다. 상처도 아물었다. 그 상처를 다시 마주 하기는 싫었다. 그가 배신한 댓가는 너무나 컸다.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오래전에 울었던 눈물이었다. 그대로 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동차 시동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다 다시 조용해졌다. 그가 갔다는 걸 보지 않아도 희경은 알 수 있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거야, 이제와서...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해도...지금은 아니야. 그러니 지금은 내 앞에 나타나지마.]
그는 저 창문 뒤에 그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아직도 그에게 있어 세상에 하나뿐인 여자였다. 그 여자가 이제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자업자득이겠지만 그 앞에 놓인 유리벽은 너무나 높고 두꺼웠다.
담배가 다 타도록 그는 서 있었다. 그녀를 재회하기 전엔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런데 이제는 미치도록 보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