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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lsh1951 2002-09-23



타들어 가는 생 풀더미를 자꾸 들썩여 주었다. 풀 마르는 향기가 자꾸 코를
버름거리게 구수하다 파랏고 노란 불꽃이 파르르, 일어났다 꺼지곤 한다.
내 삶도 가만 놔두면 저렇게 꺼지는 줄을 저 할머님께서는 모르신다.
자꾸 뒤적여 살아나게 해야 함을 이 세상에 아는 이가 누가 있을까,

.누군가 알아서 뒤척거려 주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꺼 란 생각을
잠시하고 혼자 염치없어 고개를 무릎사이에 묻었다.
언제부터인가, 난 자꾸 내 운명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이 조금씩 비집고
목을 내민다. 날 절망에서 잡아 주었으면 끝까지 책임져 주어야지, 끄집어 내놓구선 알아서 살라니,,,이건 너무해'차라리 건져주지 말지, 하고 원망도 해 본다.
예전에도 난 늘 내 운명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며 살았던 같다.
그래서 더 오래 용서하지 못하고 갇혀서 살아온 게 아니었던가...

.이제 그런 날을 돌아보며 털어 내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니었던가...
시골마당 밤하늘에는 씻어놓은 듯이 맑고 깨끗한 별무리가 금방 마당 가득히
쏟아질 것 같다. 이슬방울 대롱거리는 풀잎 위에 소복이 쌓여서 밤새 밝혀줄 별빛.별이 있음으로 까만 밤의 존재가 확인되듯이 그가 있었기에 나란 존재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나서 애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선 크나큰 변화 중 하나였다. 언제 마음이 움직여서 내가 먼저 그이 마음을 두드린 적이 있었던가, ."단축버튼을 누르자,"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란 문자가 별빛에 선명하게 부각되어 내 눈에 들어온다.
모처럼 한 기특한 생각이었는데 이게 운명인가'하고 난 피식 웃었다.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할머님은 어느 사이 가마솥에서 삶아내 온 옥수수를
양푼에 가득 담아 내 오셔서

"시굴에서 밤참이야 이눔밖에 ?종杵?먹어봐라."

구수한 냄새가 코를 또 벌름거리게 한다.
난 된장찌개로 배불린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옥수수 두어 자루를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아이고야 맛납게도 먹네"잘 쳐묵응깨 이뿌다잉. 이름이 뭐당가?"

"네, 연옥이,,연옥이라구 부르셔요".

"잉~~이름이 곱구만, 근디, 쬐깨 사연이 둥치틀어 있아베네?".

길게 묻지는 않으신다.
긴 하품을 하시는 할머님께선"낸 고단혀서 자야쓰것다"하시며 홀로의 방으로 들어가신다..
나이 들면 저절로 타인의 삶이 보이는가 보다.,,,,
고향마당 같은 정겨움에 멍석에 누워서 별을 헤이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누군가 홑이불을 덮어 주셨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을 이고 일어나, 개울가로 내려갔다.
손끝이 시리다. 어제 밤에는 시끄럽게 들리던 물소리가 음악처럼 맑다.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심장까지 짜릿하다. 올라와서 마당을 치우고 밤새 타다 남은 재를 삼태기에
쓸어 담아 텃밭고랑에 부어 줬다. 어렸을 적 내 집 마당에 서 있는 착각에 빠진다.
아직은 꽃대가 덜 올라온 상추 대에서 상추 잎을 땄다. 뽀얀 우유 빛 물이
젖꼭지에서 젖이 흘러나오듯이 방울방울 솟아난다.
난 혀끝을 가만히 대어 보았다,'앗~써! 그러나 뱉어내지는 않았다.
인생의 쓴맛이 이것에 비하랴...
반들반들 윤기 나는 풋고추도 한줌 땄다. 제 멋대로 자란 오이줄기에 방퉁거리진
오이를 몇 개 따서 개울물에 씻어 밥상으로 가져 왔다.

"아이, 연옥아줌마는 오이를 왜 잴루 물짠눔(못생긴)이루 땄대유,,,좋은 눔 다 냅두구시리,,,"

"아마 이놈들은 내가 안 따오면 그냥 밭에서 썩을 거야...얘도 태어난 구실은 해야지...!"

할머님이 그 소리에 뜻깊은 미소를 지으며 웃으신다.

밥상을 치우고 할머님을 따라 밭으로 나갔다.
고추 밭고랑의 풀들을 뽑아서 마당한쪽 거름더미 쌓아 놓으시는 일을 거들었다.
어느새 난 할머님하고 손발이 척척 맞는 파트너가 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다. 점심때쯤. 할머님은 실한 옥수수를 따서 가마솥에 삶았다.
큰 양푼에 담아서 청학동 마을로 들어가는 길 옆 정자나무 밑에 좌판을 폈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할머님은 무공해 건강식품임을 실감나게 설명하신다.

"자 ,순수자연산 우리옥수수요, 무공해 자연산이여. 이놈은 아무리 먹어두 살도 안찐당깨,"
순수산골 노인네가 도시 사람들의 겁내하는 것들을 꽤뚤어 발목을 잡아 앉히신다.
할머니의 작전이 적중했는지, 빤질빤질한 도회지 사람들은 마술에라도 걸린 듯
발길을 멈추고 한아름씩 사간다. 난 옆에서 돈을 받아 챙겼다. 내가 시내에서 사
먹을 때 보다 비싼 값으로 팔아도 에누리하려는 사람도 없다.

어쩌다"할머니, 좀 비싸요."할라치면"아~비료맥이구 농약쳐맥이구 헌 놈 하구
워따견줘"그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고

"예~그렇죠"하며 조신해 져서 간다.

.그날 난 하루종일 신나게 일하고 장사 거들고 또 모깃불 피워 생 풀내음 마시며
저녁별을 헤이고,,,복잡하던 머리 속이 대청소를 해 낸 듯 말끔하다.
어느 사이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목적을 잊어 버렸다.
다음날도 아예 머리에 햇빛가리개 모자를 쓰고 수건까지 걸고 밭으로 논으로
따라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즐거웠다. 논배미에서 우렁이를 잡으며,
내 어릴 적 배암을 쫓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라 잠시 동심의 세계에 젖어 본다..
그때는 단발머리 조그만 계집아이가 목숨?을 걸고 배암을 피해 뛰었었다.
바닷가 장불만 바라보며 단숨으로 달렸다.
발끝을 내려다보면 거기 배암이 고개 빳빳이 들고 서 있을 것 같아.그리도 무섭던 배암이 여긴 없다.

.할머니의 논은 계단식 천수답으로 장마철이 아니면 늘 물 부족으로 애간장을 다 태우는 애물단지지만 그래도 여지껏 부실한 수확을 거두신 적은 없다고 하셨다.칠순이라고 믿기지 않은 정도로 대단한 건강이시다.
손녀딸 대학은 당신 힘으로 보내시겠다는 열망이 가득 차 있으셨다.
아마도 그 열망이 할머님을 건강하게 지켜 드리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어김없이 옥수수를 쪄 파시고 번 돈을 삼베고쟁이에 꼭꼭 접어 넣으시고는 옷 핀을 잠그신다,

"잊어버리시면 어쩔려구,,?.내가 염려하자,

"장날이믄 조합직원이 와서 다 갔구가빼려".하신다.

조합원은 할머님의 고쟁이 속보다 안전한 금고라고 굳게 믿으시는 어투이시다.

.해거름이 되자 다시 밭으로 가신다. 난 피곤하고 지쳐서 따라나서지 못하고
냇가에서 씻고 투박한 마루에서 잠시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커다란 삼태기에 갖가지 채소와 마늘 등이 가지런히 다듬어져
담겨 있었다(아 ~오일장 열리나 보다, 나도 따라가야지)단단히 맘먹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무석가래 에 쳐둔 못에 걸린 백열등 불빛에 어제오늘 느낌을
메모하려고 밥상을 펴고 앉았다. 산골의 어둠은 여전히 마루 밑 댓돌 위에 엎드려 전구가 꺼지기만 하면 당장 달려와서 내 몸 전부를 감쌀 기세이다.
늦도록 뭔가 준비하시는 듯 왔다 갔다 하시던 할머님께서 옆에 와 앉으신다.
쓰던 메모를 밀쳐두고

"할머니, 낼 청학마을에 다녀올게요"하였다.

한동안 어둠을 응시하던 할머님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 쉬시며,말씀이 없으시다.

"왜요? 할머니~~"

"음~거긴 볼거?종? 모다, 사람맹이루 생겨먹은 사람은 씨알머리두 ?좇?가뿌리구,,,뺀질뺀질헌 장돌뱅이 야바위군들만 남았으야. 볼껏 암것두 없당깨로".
그라구, 연옥이 낼은 그만 내 집에서 가야 쓰것다, 야박허게 헐 소린 아닝거를 내 안다먼서도 핼수없어야. 낼은 내가 사정이 있응깨로,,,"

"아~`저, 할머님, 왜요? <3편계속>


2002.8. 글:리풀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