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준씨! 당신 제 정신이야? 완전 미쳤어! 돌았다고!"
영욱은 지금까지 참았던 수소같은 폭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참을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며칠 쉬고, 돌아가겠다는 말에 그러라고 했지만 지금은 아예 회사를 그만 두겠다는 말이었다.
"나 제정신이야. 걱정하지마. 내 일이니깐"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 돌아가! 서울로 당장! 아픈 사람 가지고 장난 치겠다는 거니? 아님 죽을 여자 가지고 육체적인 쾌락을 느끼고 싶어? 너 좋다고 목 메는 여자 많잖아.
나 네 성욕을 받아 낼만큼 강하지 못해. 이제 알겠어?"
"널 사랑하는데... 그깟 회사가 대수야? 내 목숨까지 포기 해도 좋아"
"목숨? 아니 절대! 당신 목숨을 담보로 행동하는것 만큼 경솔한 짓은 없어. 그건 살인이고 자살혐위를 의미하는 거라구. 미친놈아 알겠니?"
"너랑 같이 있고 싶다구 함께"
"같이? 함께? 난 싫어! 내가 싫다고. 다른 여자 알아봐"
"... 김영욱"
"왜? 왜 날 괴롭히는 거야? 못살게 굴지마.
3개월 뒤에... 아니 내일이라도 당장 내가 죽으면?
뭐 먹고 살래? 우리 언니가 그랬니? 나 죽고 나면 보상하겠다고? 아님 복권이라도 당첨 된거야? 돌아갈 집이 있으니깐 안심 하는 거야? 뭐야?"
영욱은 하루하루 숨막히는 병과의 싸움에 지쳐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태양의 눈부심에 감탄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채 말이다.
지칠대로 지친 영욱이었지만 명준 앞에서만은 당당해 지려고 예전의 모습을 유지 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영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명준은 아침에는 영욱의 식사를 챙기고, 낮에는 영욱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주며, 저녁에는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남자의 건강한 성욕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닷새 동안은 그럭저럭 한 침대에서 손만 잡고 자는 정도로 참아 냈다.하지만 영욱의 신경을 거스린것은 여섯째날이었다.
영욱의 몸을 로션으로 마사지를 해주고 잠자리에 들려는 그 순간 참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욱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영욱의 온몸에 수소 같은 입맞춤을 했고, 영욱은 그런 명준을 터질듯 껴안았다. 사랑이었다.
몇년을 참고 기다려 온 것이 뽀얀 속살을 내보인것이다.
그 뒤 명준과 영욱은 항상 같은 잠자리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했고, 아침을 맞이했다. 영욱의 유모는 잠시 휴가를 보냈으며, 조용하고 안락한 시골에는 그 둘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함께 하는 일주일 동안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래서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을 영욱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영욱이 그렇게 반응 할줄은 몰랐다.
(19)- 대책없는 선택.
아니 알았어도 내 뜻대로 하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욱이 이 세상에 없을때. 그때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면 적당한 대답이 없었다. 그냥 모든것을 버리고 대학 선배가 봉사를 하고 있는 네팔로 가서 일손이 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있어 봤자 무얼 하겠는가.
숨통막히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 그 속에 한 무리가 되어 경쟁하고 서로 못잡아 먹어 으르릉 거리고 이제 죽기 보다 싫어졌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일밖에 몰랐으면 된거다.
그동안 시청률 1위를 달리던 프로그램 감독으로 꽤 많은 돈을 벌게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걸로는 제대로 할수 있는게 없었다.
'당신이 있어서 이 세상이 아름답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믿을수 있다.
휄체어에 의존해서, 암과 싸우는 여자. 영욱이 있어 이 세상이 아름답고, 내 인생이 존재 한다.
미친놈. 팔불출. 정신 나간놈. 이라고 삿대질 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해도 좋다. 그저 함께 함을 감사할 뿐이었다.
"최명준 너 진짜 대책 없어.
내가 사람 잘못 봤는거 같애. 그래도 난 네가 의지적이고 현실주의자인줄 알았어. 아냐. 감상 주의자야. 연애 소설에 나오는 백마탄 왕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나 죽으면 눈물이나 흘리며 시간 보낼래? 대책 없이 미래 없이 그렇게 살래? 그럼 누가 좋아해 준대? 그래... 이 집에서 내 시체 뜯어 먹고 살면 되겠네."
"사랑해."
"최명준 그만해. 죽여버리고 싶으니깐."
영욱이 나를 향해 던진것은 약 봉지였다.
"이거 먹고 죽어! 이 대책 없는 놈아. "
죽음의 공포가 뒤덮여 쌓인 밤이면 자신의 행동과 삶에 후회하며, 짧은 시간에 대해 한탄하며 숨죽여 우는 영욱을 볼때면 삶이 주는 만족감을 알수 있었다.
최고의 재벌가의 막내딸로,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는 동시통역사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녀가 이렇게 될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명준만이... 그녀가 떠나는 그 길이 험하고 멀고 두려울테니 그녀를 보듬어 주고 안아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