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죄송합니다."
"네."
백사장에 모래알 만큼은 아니지만 그 많은 사람의 틈을 비집고 이승원은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학교가 방학을 한 이후 오랜만에 나오는 거리라서 그런지 얼굴은 심기에 불편함이 가득하다. 숫자계산을 할 때 주판에 익숙한 사람이 전자계산기의 편리함도 불편하게 느끼듯이.
가야하는 방향이 서로 엇갈리는 인연이 있는 것처럼 서로의 짝을 찾아간다는 것은 물 같이 여유롭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물일지라도 수십미터 바닥으로 떨어지며 부서지는 폭포와도 같을 것이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것일까?'
이승원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6시 45분에 멈추어 있다.
'어라. 약속시간이 15분이나 지났는 데, 바람 맞는게 아닌지!'
일순간 얼굴이 굳기 시작했지만 다시 눈을 들어 백화점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6시 15분으로 바늘이 놓여있었다. 그랬다. 이승원은 집에서 옷을 입으며 바라본 시계는 뻐구기 시계로 5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어기에 지금까지 자신의 손목시계가 12시간 전 쯤에 멈추어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괜히 걱정을 했나보군. 일찍와서 기다린 다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니깐.'
열심히 머리와 눈을 돌리며 일행을 찾기도 하였지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들에게도 긴 머리가 바람에 찰랑거리는 여인들에게도 눈길 주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승원"
"어. 형. 안녕하세요."
"너가 여기 왠일이냐?"
"석주형이야말로 여기 왠일이예요?"
"나야 오늘 스터디 약속이 있어서지. 너는?"
"응. 신희인이라는 친구가 전화가 와서 만나기로 했거든. 자기네 소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같이ㅣ 만나자고 해서."
"그래! 희인이가 왜 전화를 했을까?"
"어라. 석주형이 신희인을 알어."
"그럼. 우리 스터디의 맴버인 걸."
"몰랐네. 석주형이 그렇게 학구파 인줄은!"
하나 둘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영주. 김현지. 이승희가 인파속을 헤짚고 이승원과 방석주 앞으로 왔다. 서로 어떻게 지냈는 지가 화제가 되었고 그 사이 시간은 6시 45분. 이승원의 멈춘 손목시계와 같은 바늘이 백화점 벽에도 놓여졌다.
"야. 이제 어디 들어가서 기다리지."
모인 사람 중에 연장자인 방석주가 제의를 하였고 모두들 동의하여 발길을 재촉하여 희망백화점 뒷편으로 총총히 들어갔다. 뒷길이라고 다를 바 없이 빼곡히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주일의 마지막인 토요일에 무슨 일을 기대했다는 듯이 어제 저녁의 이승원과 같은 얼굴로 사람들은 그들의 주의를 스쳐갔다.
"여기가 좋겠다. 너희들은?"
이번에도 역시 방석주가 장소를 정했고 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여기 낙지볶음 4인분하고 소주 한병 주세요."
가게에는 서너 테이블위에 지글지글 낙지 또는 오징어가 볶이고 있었고, 술잔이 오가며 자신들만의 이야기꽃에 웃음과 심각한 표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승원 일행의 테이블에도 김치와 동치미 그리고 마늘과 고추, 상추가 차례로 상에 놓여지고, 철판위로 고추장에 덮힌 낙지가 올라왔다. 낙지는 살아있어서 그런지 아님 몸을 덮은 고추장이 매워서 그런 것인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괴로워하는 듯 하여 여자들은 가엽다고 하면서도 잘려진 다리를 익기도 전에 입에물고 따각따각 씹기 시작했다.
"자. 한잔씩 들지."
"그래. 석주오빠 오랜만이예요."
이영주가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술잔을 들었고, 모두들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이승원의 머리속에는 온통 신희인 뿐이었다.
'왜. 아직 안올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걸까? 아님. 내게 전화를 건 것을 후회해서 안오는 걸까? 어차피 방학이 끝나면 학교에서 볼텐데 그런 것은 아닐것이고.'
혼자 해답을 찾았다가는 바로 오류임을 인정하고, 술잔을 그의 눈 높이에서 연거푸 왔다 갔다 하며 소설이라는 대화가 심층 깊게 그리고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가 더불어 오고갔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방석주와 이승원의 서로의 견해를 이야기하느라 이마에는 핏줄이 오를 정도 였지만 어느 선을 넘지 않기 위해 한발짝 물러서는 배려를 잊지도 않았다. 둘다 세상의 명제를 찾는 다는 것은 같았지만 아직 확신을 내리기에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삐리리. 삐리리"
"여보세요. 누구세요?"
"영철오빠다."
"어 오빠구나. 왜 안와?"
"희망백화점 앞인데 지금 어디야?"
"응. 오빠 있잖아. 뒤편으로 오면 편의점 골목으로 오다가 두 번째 골목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오면 보글지글이라는 낙지볶음집이거든. 찾을 수 있겠지?"
"그래. 한번 찾아가 볼게."
다시 테이블 위에서 자신의 생각과 술잔이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영철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 승원이가 왠일이야?"
"영철이형. 안녕하세요."
김영철에게 다시 자신이 오게된 이유를 승원은 설명하며 여전히 오지 않는 신희인에게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신희인이 오지않는 이유에 대해서 묻지를 못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신희인과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받을 까봐서. 그렇지만 이승원과 신희인은 아무 관계도 아니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전화 통화를 두 번 밖에 하지못한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인연의 끈이 있겠는 가?
새로 자리한 영철이가 술잔을 권하며 자리는 계속 되었지만 1시간이 지나도 신희인의 연락은 오지 않는 다. 승원은 괜히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영철이가 권하는 술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영철에게 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