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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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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마음 2001-12-08

목갑 안의 다른 한쪽으론 손바닥 만한 수첩 하나가 있었다.
전화기 한대도 없이 살면서도 제법 여러개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선산조카,.. 경주 당숙.... 경수,,,,대구병국이...대구달수... 선산 처남...그기까지 본 그네는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쓸어 내린다.
친정이라는 말만 나와도 그네는 속이 상했다.
친정 나들이가 쉬울리는 만무했지만 그네가 결혼해서 이날 까지 살면서 친정이라고 찾아 간 적이 열손가락안에도 못든다.
명절은 고사하고 심지어 조카들 결혼식에도 제대로 찾아간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의 이유야 있었지만 그러고 산 자신한테도 속이 상하고 당연한 것처럼 어느 누구하나 챙겨서 보내주려 하는 이도 하나 없이 시집와서 지금껏 전화 한번 안 해보고 그러고 산 것 같은데 남편 수첩에 동생 전화번호를 보니까 그네로서는 마음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 사는 꼴이 이러니 동생이라고 뭐가 좋겠나.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좀 와서 발인이라도 할 때 잔이라도 한잔 치지 삐죽 봉투 하나 들고 와 내던져 놓고는 바쁜 듯이 가버린 걸 생각하면 그네는 마음마저 등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 안경. 그리고 둘둘 말려진 붓자루며 벼루 먹이 담겨져 있고 그 목갑 옆으로는 십여년 동안 모아온 신문쪼가리들이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상태로 와이셔츠 종이상자 안에 수북이 담겨져 있었다.
그네는 순간 남편에 대한 원망이 뻗쳐 올라왔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없이 살아도 신문은 꼭 봐야 되고 맛난 것도 꼭 챙겨서 먹어야 하고 하다못해 초등학교 운동회가 있으면 어린 조카들 죄다 불려서 잔치집처럼 국도 끓이고 새김치도 담고 해서 큰집이라고 꼭 그렇게 흉내를 내게 했던 남편이었다.
조카들 소풍날이며, 심지어 큰조카는 생일까지 챙겨서 다문 몇 푼이라도 손에 쥐어져야 했던 것도 그 돈을 만들기 까지 자신은 손놓고 있으면서도 그리 하라 꼭 일러주곤 하던 남편이었다.

그네는 그런 남편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네 스스로 이해를 하려 드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네만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어찌 수학공식 구하듯 할 수 있는 것이던가.
그네에겐 한참이나 아래 시동생 정임이아베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맏형인 남편을 무시하려 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공부도 집안에서 제일 많이 했고 인물이며 말솜씨며 어디 하나 흠 잡을 때 없었던 남편이었을때에는 그이도 나름대로는 형을 자랑스러워 했던 이였다.
하지만 남편은 순경직을 그만 두고 난뒤부터 그네 자신이 생각해도 사람이 그리 썩 잘나 보이지가 않았다.
그말은 그네 뿐만 아니라 남편을 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대범하지도 않았고 융통성도 전혀 없어 쓸데없는 고집으로 일관해 오던 남편이었다.

맏형이라고 그래도 재산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물려 받았으며 그저 어른 모시고 살면서 받는 당연한 그네의 몫이려니 했었다.
하지만 시동생은 은근히 그것이 마음에 담겨져 있었던 눈치였다.
정임이엄마의 야무진 살림살이에다 적당한 생활력에 지금은 그래도 작은 마을이지만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사는 걸 보면 시어머니는 맑은 정신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정임이 엄마를 얼마나 이뻐했는지 모른다.

정임이네 셋째 자식이 아들로 태어나면서 우리 집안에 경사났다며 펄쩍펄쩍 뛰던 시어머니였다.
아들 하나만 더 나아서 우리 집 장손 만들자며 정임이네를 그렇게 더 달래고 더 얼려가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그집을 들락거리던 이였다.
하지만 정임이네는 그 뒤로 다시 딸을 낳았고 시어머니의 실망은 그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남편은 속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네가 양자 얘기로슬쩍이 남편의 의중을 떠 받더니
버럭 소리부터 질렸던 사람이다.

자식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 우리 팔자인가보지 뭐 하던 사람이다.
경수아들이 장손 노릇 해도 되고 이도 저도 아니면 다 그만 두라지 뭐! 내 죽어 제사밥 못 얻어 먹을까 걱정스러운 것도 아니고 다 소용없는 짓인게야.
죽으면 그만이지. 뭔 제사야 제사는...
그렇게 큰소리만 쳐 대던 남편도 가고 없다.

그의 대가 이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니 그네로서는 더 없이 허무해서 견딜 자신이 없다.
그네는 또 한바탕 용을 트는 몸부림을 친다.
꺼억꺼억 소리내어 울어보는데 그것마저 시어머니 때문에 맘껏 울어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그 밤을 보냈다.
다행히 시누 둘이가 가지 않고 집을 지켜 주어 그나마 적적한 기운을 조금은 덜어낸 듯했다.

삼오제 준비에 한창이던 그네가 갑자기 시어머니를 또 찾기 시작했다.
다른 이가 말리는데도 그네는 기어이 시어머니를 삼오제에 대동을 시켜 뫼시고 갔다.
남편의 무덤을 시어머니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의 큰아들의 무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