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이네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다.
어무이도 어무이지만 형님이 영 아인기라,
우째 저런 몸으로... 무슨 병에라도 걸린 건 아닌지...
순간 그네는 부스스 걱정스런 마음이 생긴다.
어무이 보다 형님이 먼저 앞서 가시는건 아닌지 몰라,
정임이네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러기야 하겠어. 아무튼 형님 병원부터 한번 모시고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시어머니의 기억은 도무지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친손주고 외손주고 간에 아이들 얼굴은 전혀 알아 보질 못했다.
제일 큰 조카인 정임이 얼굴도 몰라보고 누굽니꺼 하던 시어머니였다.
시누들 얼굴도 알아보고 그네의 남편이었던 큰아들 얼굴도 잊지않았는데 정임이아베 얼굴만큼은 도무지 못 알아본다.
아마 초등학생이었던 경수도련님 기억에서 완전히 멈추어 있는 모양이다.
시누며 큰며느리인 그네한테도 가끔씩은 느닷없이 다른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쉴새없이 먹을 것을 숨기고 베개를 안았다 눕혔다 업었다 하면서 그것을 애기인냥 손에서 놓질 않았다.
그러다가도 베개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는 통에 그네는 늘 그렇게 긴장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가는 어데 가고 없노?”
시어머니는 집에 오기가 무섭게 큰아들부터 찾았다.
“누구?”
막내 시누는 장난끼가 발동한 모양이다.
"갸, 말이다. 갸!“
“엄마! 갸가 누군데?”“와 이케샀노? 고마, 이집 주인 말이지 누구긴 누구야?”
“이집 주인 이름이 뭔데 엄마?”
“고마 아지메는 집에 갈쇼 고마?”
시어머니는 막내 시누한테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이구 우리 엄마야. 정신 좀 나나 싶더니 그새, 내가 무슨 아지메고? 엄마 딸아이가.”
시누는 한참 재미있어 하더니 아지메 소리 한마디에 오만정이 떨어지나 보다.
“아이구 엄마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 큰오빠, 지수오빠 오늘 장례 치루고 안 왔나. 저 봐라.”
팔을 뻗어서 영정사진 있는 쪽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은 누구고?”
시어머니의 표정이 또 다시 멍청해졌다.
“누구긴 누구야. 이집 주인 이지.”
“이집 주인?”
“엄마가 찾고 있는 이집 주인 말이야.”
“사진만 여기 다 두고 어디 갔노 말이다.”
그렇게 두 모녀가 말장난을 하고 있는 동안 그네는 남편의 유품들을 꺼집어 내 놓기 시작했다.
키큰 남편이 발돋움을 해야 내릴 수 있는 높이의 선반에는 남편이 아끼던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네는 그것을 내리기 위해 마당 한켠에 놓여 있던 철제 의자 하나를 가지고 들어 와야만 했다.
그네는 그것을 만지는데 예전 같지가 않다.
왜이리 조심스러운지...
혹여라도 떨어트릴까봐 손에 작은 경련이 일고 있었다,
재질만 나무이지 색깔은 이미 제 색깔을 못내고 손때로 얼굴이 져 시크멓게 변해 있는 제법 큰 목갑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도 아닌데 그네는 그 속이 새삼 궁금해진다.
늘 글씨연습을 하던 만년필한자루와 잉크, 손잡이 부위가 반들반들하게 달아져 있는 가위 한자루가 그리고 스크랩을 위해서 잘라놓은 두어장의 신문쪽지가 얌전하게 밑에 깔려 있었다.
그네는 그것을 빼내어 본다.
지난 봄 5월13일자 사설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거 할 정신이라도 있었나 보다. 수십년 동안 남편이 한 일은 그저 아침에 잠깐 논 밭에 나가 푸성귀 좀 뜯어다 주고 많지도 않는 서너 마지기 논에서 나는 쌀로 일년 양식 해먹으면서 그렇게 일상의 생활을 먹을 만큼만 챙겨 먹겠다는 식으로 살아왔다.
그렇다고 게으른 사람은 절대 아니다.
단지 사는 것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나머진 순전히 그네의 몫이 되어서 처음부터 그리 살아온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네에게도 남편의 봉급으로 살림만 하던 때가 있었다. 꼭 횟수로 5년이 전부였지만 남편이 순경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는 갓 결혼한 신혼이었고 처음부터 맏자식이었지만 따로 떨어져 지서사택에서 신혼을 시작 했었다.
5년이라는 달콤한 신혼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네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5년 속에는 전쟁이 3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전쟁속에서 남편은 시어머니의 간절한 바램인 순경직을 그만 두게 된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남편 역시도 이미 시어머니의 바램이 아니더래도 그만 두고 나왔을 것이다.
남편은 예전하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말이 많아지고 간섭도 심하고 감정 또한 급격하게 잘 변해서 옆에 잇는 사람들을 늘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남편을 시어머니는 그래도 그나마 살아서 돌아와 준 게 고맙고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부터 그네는 산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희망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붙어 있는 목숨이니 하면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네가 그러고 사는 동안 남편은 나름대로 자신의 취미도 살리고 붓글씨 펜글씨 등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고 주위에서 평판이 자자해지고 대서소를 차려도 괜찮겠다는 말도 듣곤 했었다.
마을의 조그마한 일 까지도 다 나서서 봐주고 글을 써 줘야 할 때는 맘껏 자신의 실력을 뽐내보기도 하면서 저녁 무렵이면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 고민하고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자신이 직접 장에 나가 장거리도 봐오고 푸성귀도 들고 나가 돈도 좀 만들기도 하면서 그렇게 소담하게 지금껏 살아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