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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teaser1 2001-03-26

-전화-

뜨거운 방바닥 위에 마치 흐물거리는 연체동물처럼 누워서 서너시간을 밍기적거리고 나니 머리골도 지끈거리고 온몸 마디마디가 정말 연체동물이라도 된듯싶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서 억지로 기지개를 펴고 벌떡 일어나서 커텐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빛과 띵할정도로 차가운 공기에 모든것이 제자리를 찾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밖은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이고 내가 서있는 이 방안은 깊은 바다물속 가라앉은것 같은 고요한 정적인 공간이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당기니 쏴한 겨울 공기와 함께 진한 담배연기가 내 깊은 폐부속을 휘집고 들어온다.
머리가 띵하다. 오후까지 내내 텅비었던 위장을 겨울바람과 담배연기로 가득 채우기라도 하듯 난 아주 깊이 연기를 빨아드렸다.

내가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를 창밑으로 지나가던 꼬마녀석이 신기한듯이 멍하니 바라보다 지나가고 털지도 않은 내 담배재가 바람에 눈꽃처럼 휘날리는데 난 아직도 몽롱하고 잠인지 담배인지에 모를것에 취한채로 난 그저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삐리리리리~ 핸드폰이 울린다.
받을것인가 아님 그냥 무시할것인지 망설이다가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내가 먼저 말을 띄웠건만 전화를 건 상대는 아직껏 아무말이 없다.
[여보세요] 다시한번 내가 말을 하자 상대가 말을 했다.

[유리언니....저에요.] 나에게 저에요..라고 말을 하는 이 여자가 누구더라? 난 멍한 머리속을 뒤집어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언니라 부를만한 여자들과 목소리들을 쭈욱 대조하고 있었다.
[언니...저 영미에요.] 복잡하게 돌아가던 내 머리속은 순간 멈춰 버리는거 같았다. 영미....

[어...그래...영미구나...]난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잊고 말았다.
[언니...행복하시죠? 전 잘 지내요. 그냥....그냥 오늘은 갑자기 언니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영미는 언제나 처럼 나에게 행복하시죠...라고 인사를 했다. 행복하시죠....행복하시죠....
그런 그녀는 과연 행복한걸까?
[그래....] 난 더이상의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녀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거 같은데 내 머리속은 하얗게 비워진 백지였다.

[언니가 가끔 그리워요. 예전처럼 언니랑 연극도 보고 싶고...언니랑 차도 마시고 싶어요...하지만...그럴수 없다는걸 아니까...]

영미는 계속 나에게 뭐라뭐라 지껄이고 있었고 난 그냥 한쪽귀로 모든말들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뭔가 대꾸를 해줘야 하는데 난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언니...그럼 행복하세요. 가끔 생각나면 전화 해도 되죠? 언니...]

늘 그렇듯이 그녀는 나에게 행복하라고 인사를 했다.
가끔 생각나면 나에게 전화를 해도 되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지금처럼 내가 그녀를 어느정도 잊을 몇년후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전화 할께요...라고 말하고 그녀가 떠난지 벌써 3년도 더된 일이니 말이다.

[영미야....어디있니? 멀지 않으면 만나자 지금....]
난 비로소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그녀는 망설이는듯 아무말없이 한참을 보낸후에야 말했다.
[언니.... 멀진 않아요. 하지만.... 언니 나 만날만큼 날 용서가 되나요? 난 아직 내가 용서가 안되는데....] 왠지 그녀의 말꼬리가 젖어 있다.

용서를 했냐구... 내가 그녀를? 내가 그녀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과연 그녀는 나에게 용서 받을 잘못을 한걸까?

[만나서 이야기 하자...벌써 3년도 더된 이야기야...]
난 다시 담배를 한대 빼어 물었다.
왠지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안될꺼 같았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생담배 타는 냄새가 독하다.

[영미야 다른거 다 잊고 우리 그냥 오늘 만나자....
너 거기 기억하지? 충무로에 있는 하얀풍차....거기 아직도 있어...우리 거기서 만나자... 나 지금 준비하고 나갈께 너두 와...시간은 정하지 않을께...나 갈때까지 기다려...나두 너 나올때 까지 기다릴께....알았지?]

영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난 그냥 전화를 꺼버렸다. 그녀가 다른 말 하지 못하도록...

피우던 담배를 창밖으로 휙하니 던져버리고 창문을 닫았다. 머리속이 복잡하다.

난 이제 그녀를 만나러 나갈것이다.
나에게 어떤 용서를 바라는 그녀를 난 과연 무엇을 용서하고 받아 주어야 하는것일까....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게 아닐까....


오늘 그녀를 만나면 난 뭐라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손이라도 잡아 줘야 하는걸까.... 머리속이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