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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추적거리던 비가 어느새 식당 바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붓기 시작하면서 손님은 뚝 끊겨버렸다. 식사를 하던 손님들도 문득 문득 고개를 꼬아 밖을 내다보며 비슷한 얘기들을 꺼낸다.
-이제 장마가 시작되려나.
경숙은 카운터에 앉아 장부를 맞춰보는 척 하면서 영 심기가 불편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 형자를 힐끔거렸다. 형자는 주방 입구에 퍼질르고 앉아 마늘을 까고 있었다. 토요일, 모처럼의 장사를 놓치고 있대서가 아니었다. 형자는 깐 마늘을 거의 내동이치듯 양동이에 팽개쳤다.
-밸도 없는 눔.
이미 같은 말을 여러번째다. 그것도 꼭 마늘을 동댕이칠 때마다이다. 점심손님 치르고 종업원들하고 둘러앉은 식사 중에 마산댁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 이후부터이다. 내달에 아버지 환갑잔치 치른다는 미스 임에게 특별 무슨, 효도 보너스라나 하면서 선뜻 선심까지 약속할 정도로 엄마, 형자의 기분은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좀 호들갑스럽게 숨까지 헐떡이며 형자를 찾는마산댁의 전화를 넘겨주는데 형자도 앉은 자리에서 부리나케 달려왔었다.
한 두 달 정도 되었나보다. 얼핏 내 기억속에 남아는 있는 것같지만 형체를 정확히 더듬을 수는 없는 마산댁이라는 여자로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
-아, 마산댁? 그 아줌마, 엄마 스파이잖어.
경희는 멀리 바다건너 제주도에 살아도 벌써 10년째, 엄마 곁에서 식당일을 돕고 있는 자신보다
엄마와 훨씬 가깝다. 모처럼의 통화에서 입에 올린 마산댁을 경희는 낯설어 하지 않았다.
-스....파이? 무슨 스파이?
-성국이가 마산댁 아줌마 가게 근처로 살림차렸대잖어.
-마산댁이 누군데? 너 아는 사람이야?
-어, 자세히는 모르는데.... 좀 오래 전에 엄마하고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래지, 아마. 우리 어렸을 땐가봐.
하필 성국은 그 옛날 형자와 형님, 동생한다는 수다스런 아줌마 근처쯤에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 동네 상가에서 정육점을 한다는 마산댁은 반은 동생으로서의 의무감에 반은 그 나이 과부들이라면 쉽게 빠져드는 호기심에 또 그 나머지가 있다면 순전히 재미삼아, 형자에게 수시로 성국의 근황을 보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일?
형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 그 잘난 장모 생일 모실려고 행차하셨다? 이 비 오시는데?
하이구.....밸 빠진 눔. 허이구....쓸개 빠진 눔.
그렇게 전화도 거칠게 팽개쳐버리면서 입에 올린 '밸 빠진 눔'이 두 시간이 족히 넘도록 여전히 형자의 입에서 끊이질 않고 있다.
'남자 잡아먹는 상'이라서 그랬다고 했다. 부모는 유난히 눈이 많았던 지난 겨울, 또 그 지독한 꽃샘추위 극성이던 2월 말 한파속에 부모는 성국과 그 아이를 집앞에 세워두고 집에 들이지 않았다.
건드리면 톡 쓰러질 듯 하늘거리는 몸으로 보들보들 떨고 선 그아이의 모양을 보다못한 경숙은 집에 달려가 누비 옷을 가져다 둘러 주었다. 그 아이는 말도 못하고 고개만 깊숙이 조아렸고 성국은 그 옆에서 돌부처가 된 듯 입만 꾹 깨물고 있었다. 성국의 고집은 대단했다. 어려서부터. 딸만 다섯낳고 여자 나이 40넘어 본 3대독자 성국이 고집이 안 세대도 이상한 일일 거다.
녀석은 화가 나면 말을 삼켰다. 하루고 이틀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자와 두식의 속을 있는대로 파헤쳤고 하나는 어려서 죽고 이젠 넷 남은 누나들의 가슴도 안달복달하게 만들었었다.
-이제 어머니, 아버지 안봅니다. 전 죽은 자식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한 세시간 쯤 그렇게 하늘거리는 그 아이랑 문밖에 서있다가 성국은 그렇게 가버렸다. 그리고 진짜 반 년이 다 되도록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하지 않았다. 지난 봄에 마침 아버지 두식이 칠순을 치를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올 봄 두식의 생일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 아들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두달 정도 전에 성국이 경숙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그 아이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한마디만 전하고는 일방적으로 끊은 게 다였다. 무기력한 누나들이 부모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음을 성국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굴도 한 번 안보고 순전히 생년월일 생시로 가늠해 본 그 아이에 대한 평가는 '남자를 잡아먹을 여시'가 다였다. 형자와 두식에겐.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귀중한 아들을 여시에게 빼앗기고 태평하게 있을 수 있는 형자와 두식은 물론 아니었다. 형자는 혈압으로 그 사이 응급실을 두번이나 다녀왔고 두식은 기침이 더 깊어졌다.
"성국이가....장몰 모시러 갔대?"
시선은 장부에서 떼지 않고 될 수록 남의 일 지나치듯, 그렇게 경숙은 입을 떼었다.형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몇 안남은 마늘을 동댕이치는 손만 더욱 빨리 움직였다.
"여기, 보쌈 일인분 더 주세요!"
창가에 앉은 손님이 경숙쪽에 대고 소리쳤다.
"예예."
경숙은 일어나 주방쪽에 대고 '보쌈 일인분, 15번'을 알렸다.
이제 동댕이칠 마늘도 없어진 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털었다.
"느이 아버진, 황사장 한테만 가면 함흥차사지, 함흥차사야."
어제 들어 온 고기 중에 냄새 고약한 게 섞여 있다며 갔으면 당연히 오래 걸리리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 형자는 아무곳에나 대고 누군가를 타박해야만 그 '밸 빠진 눔'을 좀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이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빗줄기는 내일 저녁까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텔레비젼에서는 기상특보니 뭐니 하면서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고기 몇 점 더 올려 드려라. 손님도 없는데.....먹는 장사는 이럴 때 손 커야 하는 거야."
미스 임이 들고 내가려던 보쌈 접시를 형자는 다시 거두었다.
"고기만 얹음 어떡해? 김치도 같이 보태야지."
"예예. 사장님."
주방도 그렇고 서빙하는 종업원들도 그렇고 유독 오늘은 움직임이 잽싸다. 이제 형자의 심기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미스 임만 빼고는 10년이 다 되가는 사람들이었다. 한솥밥을 먹은 지가.
"아줌마, 다른 데 좀 틀어주심 안돼요? 연속극 할 시간인데....."
보쌈을 추가한 15번 테이블의 여자 손님이 경숙을 향해 말했다.
"예. 그럼요."
텔레비젼 채널을 바꾸려고 카운터 위의 리모콘을 찾던 경숙은 문득 그 손을 멈추어야 했다.
-빗길 고속도로 사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오늘 오후 다섯시 반경 승용차와 7톤 트럭이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왜 그 소리가 경숙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경숙의 눈에 옆으로 누워있는 트럭과 종이짝처럼 찌그러진 승용차가 들어왔다.
"빨리 틀어주세요, 시작했겠다."
15번 테이블의 여자소리가 귓등으로 스쳐갔다.
우산을 받쳐 든 기자는 손에 그 승용차에서 발견했다는 사진을 비춰주며 이렇게 말했다.
-참혹한 교통사고 뒤에 남은 이 한 장의 사진. 이 곳 현장을 수습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KBC 김철홉니다.
이미 화면은 다른 뉴스로 넘어갔지만 그 아이 등 뒤에서 그 아이를 꼭 껴안고 있는 성국이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 백 미러에 걸려 찰랑거리고 있었을 그 사진이 경숙의 시야에 빨려들 듯 확대되어 새겨졌다.
경숙은 의자에 털퍼턱 무너지듯 앉으며 형자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뒤늦게나마, 이제서야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려왔다.
형자는 마침 주방에서 이번에는 양동이 가득 양파를 내오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