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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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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인연의 사이


BY 로미 2000-07-02

새미는 곧 나아졌다. 의사는 자신이 아들만 둘이라 이렇게 예

쁜 딸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많은

데 유독 새미를 귀여워하는 건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일주

일쯤 치료가 끝나고 새미는 완전히 회복되어서 다시 유치원에도

갔다. 새미가 유치원에 가고 나면 난 한가한 시간을 책을 빌려

서 보는데 썼다.


내가 살던 동네엔 목요일마다 오전에 새마을 문고 차가 마을을

돌았는데 농촌지역이라 도서관이 없어서 시에서 운영하는 거라

고 했다. 무료하던 나도 책을 빌리러 나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한 보따리씩 책을 빌리러 오는 슈퍼집 남자와 마주치곤 했다.

눈인사만 나누고 각자의 책을 빌리고 헤어졌지만,난 꼭 한 번

그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하고.

대기업의 잘 나가던 사원이었다던 그는 피곤하고 초라해보였다.

그렇다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 후회하

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난 믿고 싶었다. 아마,조강치처를 버렸다

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난 그를 미워하고 있었는지도 몰랐

다. 조강지처,그거야 말로 내가 가진 기득권이었으니까.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이라도 모든 조강지처들은 보호 받아야 한

다는 그런 의식,그 기득권에 도전하고 그걸 버리려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적의 같은 것. 그런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초라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웃음소리가 밖

으로 새어나 올 정도로 행복해 했다. 특히 아기를 가진 슈퍼집

여자는 첫아기를 가진 것처럼 설레어 하면서 아기가 남자이기만

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난 딸이 태

어나기만 빌었었다. 무슨 까닭없는 심술이었는지. 이미,그들은

정식 부부가 되었었는데도. 그리고 그 사랑의 댓가로 이미 치

를 것은 치른 상태였는데도,난 그?O다.


제주에서의 휴일은 처음엔 신이 났었다. 하지만 관광지를 돌아

나니는 것도 금새 시들해졌고,난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뒷 베란

다로 보이는 바다는 어느 새 벽에 걸린 그림만큼이나 흥미롭지

못했고,육지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열린 세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

라 쉽게 빠져 나갈 수 없는 갇힌 세계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런 내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남편은 한라산엘 가자고 했다. 산

록도로를 한 바퀴 달리면서 드라이브를 시켜주고,신천지 미술관

쪽으로 방향을 튼 남편은 내게 쉬어 가기 좋은 카페가 있다고 말

했다.

"직원들이랑 왔었는데,카페랑 집이랑 손수 지은 집이야.커피 맛

이 아주 좋아. 그리고 아줌마도 서울 사람이야. 한 번 가보자

고."

"그러지 뭐,새미도 목이 마른가봐."

타향에 나오면 웬지 고향 사람이 그리운 거 아닐까. 그 카페는

아담하고 예뻤다.

주인 아줌마 혼자 운영하는 그 찻집은 남편 말처럼 커피향이 좋

았다.무려 8가지를 섞는다는 커피 향도 좋았지만 산속에 집을

짓고 여유있게 카페를 운영하면서 이것저것 정성스레 꾸며놓은

그 분위기가 좋았다. 커피를 다 마시자 연하니까 더 마시라며

잔을 채워 주는 아줌마의 소박한 웃음도 맘에 들었다

"여기 자주 오자 우리."

"그러지 뭐.당신 맘에 드는구나?"

새미도 주스잔을 그 작은 손으로 꼭 붙들고 열심히 마시고 있었

다. 손님이 별로 없는 한가함이 좋았다.

"경마장 끝나면 손님들이 몰리지요. 웨딩촬영도 우리 집에서 많

이 하고,신혼부부들이 들러서 저기 광목 천에다 글도 써 놓고 가

요. 종이보다 더 운치있지요? 새미엄마도 자주 들려요. 글도 남

기고. 새미 주스 더 줄까?"

오랜만에 편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시며 즐겁게 얘길 나누다 무심

히 창 밖을 내다보니 카페 앞에 차가 한대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손님은 뜻 밖에도 정소아과 원장이었다.

"어,정선생이 오네."

주인아줌마는 그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는 폴로티에다 면바지 차림으로 병원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달

라 보였다. 여유있는 웃음을 머금은 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와요 정선생. 오늘 휴일인데 서울 안 갔었나 보네?"

"네.좀 피곤해서...어,이거 누구지? 아는 아가씬데.그지 아가

씨? 이름이?"

그는 새미를 알아보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선생님.새미예요. 여보,새미 다니는 병원 선생님이

셔."

"어이구 안녕하십니까? 전 김경호라고 합니다. 새미 잘 돌봐주

셔서 감사합니다."

"전 정준수라고 합니다. 뭘요,제 직업인데요. 새미 이젠 안 아

프지?"

"네에~"

새미는 배시시 웃으며 주스잔을 여전히 꼭 쥐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여기 같이 앉으시지요.제가 차 한잔 대접하고 싶

은 데요."

"아 괜찮습니다.가족끼리 오붓하게 말씀 나누시는데 방해가 되

는 거 아닙니까?"

"앉으세요,선생님."

엉거주춤 일어서며 나도 거들었다.

"그래요,여기 같이 합석해요,새미때문에 아시는 구나? 이분들

도 서울에서 오셨대. 알고 있었어요? 정선생도? 정선생은 여기

혼자 내려와 있어요. 주말부부지요. 서울에 안 올라갈 땐 자주

들려요..."

"그러시군요.반갑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 딸 좀 잘 부탁합니

다. 이 녀석 자주 앓아서요."

"아이들 다 그렇지요.걱정마십시요.전 아들만 둘인데 이렇게 이

쁜 따님을 두셔서 좋으시겠습니다.저희 집엔 남아나는게 없습

니다. 딸애는 안 그렇죠?"

"그렇지요. 새미는 얌전한 편입니다. 근데 사모님은 같이 안 내

려오셨나보죠?"

"네 아이들 땜에 서울에 있죠. 저 혼자 와 있습니다."

"왜 이곳에?"

"제주가 좋아서요."

간단하게,그렇지만 어딘가 쓸쓸히 그는 말했다.

남편이랑 정선생이 얘길 나누는 동안 난 조용히 새미만 바라보

고 있었다. 저 사람 부인은 남편을 혼자 이 곳에 두고 맘이 놓

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휴일엔 뭘 하십니까 주로."

"서울에 올라갈 때가 많죠. 이번 주는 좀 피곤해서 안 갔지만

요. 처음엔 자주 갔었는데 그것도 자꾸 미뤄지네요. 이렇게 있

을 땐 잠도 실컷자고,밀린 빨래도 하고,낚시도 나가고.그럽니

다."

"저도 낚시를 참 좋아하는데요. 집사람이 같이 놀아 달라고 해

서 이렇게 잡혀 오지만요. 언제 한 번 같이 출정가십시다."

"네 그러지요"

남편은 정선생이랑 동갑이었다. 친구를 만난 듯 남편은 즐거워

했다. 그 동안 난 카운터 쪽으로 가서 CD를 한 장 골라 갈아 끼

웠다. 주인 아줌마는 손님들이 마음대로 음악을 틀수 있도록 카

운터 앞에 CD를 진열해 두고 있었다.

"음악 좋은데요? 엘가의 사랑의 인사 인가요?"

"네.전에 어디선가 들었는데 맘에 들어서요."

남편은 음악같은 건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과 사는

데 익숙해져 있던 나는 정선생이 곡을 아는 척 하자 신기한 생각

까지 들 정도였다. 아주 대중적인 음악이었는데도.

커피를 마시면서 가만히 음악을 듣는 정선생의 모습은 오래전 알

던 친구의 모습과도 같았다. 아무말이 없어도 편안한 느낌을 주

는 그런 사람이었다.


저녁에 남편은 말했다.

"뭐,여기 아주 오래 살껀 아니라도 친하게 지낼 친구 하나 정

도 알아 두는 건 나쁘지 않지. 더구나 의사선생인데 새미도 잘

돌바 줄꺼구. 그렇지?"

"글쎄."

남편하고는 다른 분위기의 의사. 새미의 의사선생님.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선생이 우리 생활 속으로 끼여 든다

고 생각하니 어색했다. 난 그가 먼 나라 사람같은 생각이 들어

서 어려웠다.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 이를테면 의사나 검사

이런 부류의 남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내 학벌이나 외모도 자신이 없었지만 집안도 자신

이 없었다. 내겐 결혼은 아주 현실적인 생활이었다. 어울리는

사람끼리 만나서 사는 것- 그게 편안하고 행복한 거라고 믿었

다.남편도 그런 내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고,그

런 소시민적인 삶에 만족해 왔었다. 남편이 그다지 부족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의사와 친구하기엔 좀 열등하다고 생

각되었다. 어릴적의 친구라면 또 몰라도... 남편이 그와 친해지

면서 비교되는 게 싫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남편을 그

와 비교하는 내가 싫었다.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시간이 나면

같이 낚시를 다니기도 하고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뭔가 부탁을

하기도 했으며,종종 집에 와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객지

에서 혼자 해 먹는 밥이 오죽하겠냐며 남편이 집으로 초대하기

도 하고,낚시에서 뭔가 잡아올리면 매운탕을 끓여 나눠 먹는다

고 들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난 집에서도 종종 화장을 하고,옷차림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정선생과 내가 마주 앉아서 얘길 나눌 시간은 별

로 없었지만,그는 내 음식 솜씨가 정갈하다고 칭찬도 해주고,집

안이 말끔하다며 내 수고를 인정해 주어 날 기쁘게 했었다. 또

어느 날인가는 환자의 보호자가 선물로 보낸 것이라며 꽃다발

을 들고 와서 내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오래도록 그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 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지도 않은 애를 데리고 병원에 찾아 갈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꼭 그렇게 봐야 할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마땅히 경계했어야 할 나의 그런 변화를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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