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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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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사라 2000-05-27



그녀가 이사를 온 건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겨울의 끄트머리에서 였다.

그녀는 이사온지 불과 하루만에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기 시작하여 잔잔했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관심의 근원지는 우선 그녀의 수려한 용모에서 비롯되었다.

평균치를 넘은 훤칠한 키에 마른 체형을 한 그녀는 서글서글한 눈매에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온화한 인상을 가진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특히,끌어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나는 그녀의 길고 하얀 목덜미는

정말이지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매료될만 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마리 학의 이미지로 무료했던 우리들의 일상에 성큼 다가왔다.

제법 봄볕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면서 아낙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진 동네에는

그녀에 관한 소문과 입방아들이 훨씬 더 노골적으로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세상에,글쎄 쎄컨드라지 머야.

---아이구 인물이 아깝다,아까워. 인물값도 못허구 왜 그러고 산담.

---이 여편네야,그게 다 인물값 하느라 그러는 거지!

---아,그게 그런가 또....

나도 본 적이 있다,그녀의 남자.

동네 여자들은 그남자를 신데렐라라고 불렀다.

12시 종이 울리면 마법이 풀리던 신데렐라처럼 9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그녀에게 왔다가

자정을 넘기기가 무섭게 그집을 빠져나오던 그남자를 빗대서

우스개소리로 붙여놓은 아줌마들끼리의 암호명이었다.

그남자. 이따금 어둠속에서만 본 실체였으나 그녀보다 한참 연상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낡은 오토바이 한대 끌고 매일 같은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나 유리성 속에 가둬둔 보물을 확인하고는 사라지던 남자.

정말 그랬을까.

자기만의 방에 숨겨놓은 진귀한 보석하나 만져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사라지는 거였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사는 다세대 일층의 좁다란 마당은 내가 사는 단독주택 이층 테라스에서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래서 나는 빨래를 넌다거나,볕좋은 오후에 차한잔 들고 앉았을 때 종종 마당에 나와있는 그녀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덤을 얻은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지며 은밀한 시선으로 그녀를 관찰하곤 했다.

그녀에겐 이제 갓 백일이 지났을까 싶은 어린 아기가 있었다.

볕좋은 오후엔 그래서 늘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당에서 혹은 잔디를 잘 입혀놓은 동네 놀이터에서 아기를 끌어안고 서성이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낮은 허밍음으로,때로는 무대에 선 가수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말러의 주옥같은 가곡이나 카르멘의 아리아를 노래했다.

나는,그런 모습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를 처음 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꼬옥 끌어안을 수 있는지,

마치 빼앗기지 않겠다는 필사의 의지로 먹이를 움켜쥔 약자의 모습처럼,

이세상 천지에 단 둘뿐인 사람들처럼 엄마는 아기에게,아이는 엄마에게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왔으나 참으로 쓸쓸한 정경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