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하는 동안 영감은 다시 운동을 나갔나 보다.
'옳다구나. 심부름도 좀 시켜먹자.'
누구라도 곧이 듣지도 않을 소리지만, 결혼 후 영감에게 심부름을 시켜 본 역사가 없다. 그러나 이건 사실이다. 언제나 영감은 제왕이었으니까.
"응. 왜?"
분명히 영감의 전화번호를 눌렀는데, 아들 같은 젊은 목소리가 돌아왔으니 놀랄 수 밖에.
"여보세요?"
"응. 나라니까."
약간은 놀란듯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영감 목소리가 맞기는 맞네.
"들어올 때 바나나 좀 사 갖고 와요."
영감도 생소한 요구에 잠깐 동안을 두고 숨을 고른다 했더니,
"나, 돈이 없는데." 한다.
"그넘의 돈은 왜 맨날 없데요."
옷을 바꿔 입고 나갔던지 사정이 있겠지 하고,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요즘 밤잠을 설쳐서 바나나를 하나 먹어봐야겠다던 계획을 접고 나니 심통이 난다. 슈퍼가 백여리 되는 것도 아니니 밥이 뜸 드는 사이에 잽싸게 다녀와야겠다고 대문을 나서는데 영감이 들어온다.
뒷짐을 쥔 손에 바나나 보따리가 들려있다.
"돈 없다더니요."
그래도 바나나를 사 들고 온 것이 기특해서 웃어 주었다.
"난, 바나나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았지."
생전에 뭘 사 보지를 않았으니, 바나나가 몇 만원이나 하는 줄 안 모양이다.
휴~. 이제는 제왕 대우도 그만 두어야겠다. 내가 영감보다 일찍 죽으면, 영감은 혼자 바나나도 하나 사먹지 못할 터이니 어찌 세상을 살꼬.
"영감. 이제는 제왕의 자리도 그만두고, 구십 바라보는 지금의 영감으로 사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