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아버지께서
아빠 나이 5~6살쯤, 복중에 작은 아빠를 포함해서 4남1녀를 남겨 두신 채 병환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안다. 아빠와 몇 살 터울의 누나와 병약한 이란성 쌍둥이 형과 어린 남동생
둘을 남겨 두신 채.
고모는 10살이 넘은 나이에 남의 집에 식모로, 아빠는 7살쯤 남의 집에 머슴으로
보내지셨다고 했다.
-아빠의 술주정 중에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니들은 그래도 행복한 줄 알아! 나는 7살에 남의 집 머슴으로 가서 일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면 두들겨 맞고. 밥만 주면 시키는 일을 해야 했어. 형은 약하고 동생들은
어렸고 니네 고모랑 나만 고생했지. 그때 내 엄마에 대한 기억이 뭔지 알어?!
달에 한 번 내 품삯 받으러 오는 날, 해질녘 돈 세는 뒷 모습...아들 고생한다는
한마디 말없이 내 품삯만 받아 갔어! 니들은 부모 있겠다, 밥 먹여줘, 학교 보내줘.
뭔 걱정이야.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지!“-
친할머니는 오래전 돌아가신 큰아빠의 아들인 사촌 동생과 재가해서 낳은 성이 다른
삼촌과 사셨다.
우리 삼 남매와 살가운 대화를 제대로 나눈 적 없는 할머니는 내려오실 때마다
호밋자루와 보자기를 들고 산이나 들로 제철 나물들을 캐러 다니셨다. 새벽 2~3시면
바다로 나가셔서 해가 져야 돌아오는 아들 내외의 끼니 걱정을 해주신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상을 봐 놓고 나가면 자신이 먹은 설거지조차 해 놓은 적이 없었다.
아빠 나이 19, 엄마 17살, 처음 살림을 시작할 때 친할머니께서 보리쌀 3말을 보태
주신 것이 전부였단다.
그것도 당시 재가한 할머니께서 작은 술집으로 벌이를 하며 폐병 걸린 새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단다. 백수로 기거하는 새 남편이 끼니때마다 밥 먹으러 오는
아들 내외를 못마땅하게 여기니까 보리쌀 살 돈을 내 엄마에게 몰래 주며 앞으로
오지 말라고 했단다.
재혼한 분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삼촌이 나와 9살 차이로 안다. 그 삼촌이 5~6살이
됐을 때 재혼한 분마저 세상을 떠났단다. 그 후 작은 문방구를 운영하는 큰아들 근처로
이사했다.
내가 3~4살쯤에 작은 서해 마을에 터를 잡은 부모님에 의해서
친할머니께 한 달쯤 맡겨진 적이 있었다. 성이 다른 삼촌의 부주의로 나는 허리를
다쳤고 결국 척추 장애 5급이 되었다.
할머니는 큰 손주가 4~5살쯤 됐을 무렵, 큰아들마저 폐병으로 떠나보냈다.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작은 손주까지 남겨 둔 채.
그 상황에서 가출한 큰 며느리를 대신해서 할머니는 작은 손주를 입양 보내야만 했고
큰 손주를 떠안고 사셨다.
나는 할머니의 박복한 삶을 불쌍하게 여긴 적이 없다.
빈손으로 오셨던 할머니는 캔 나물 한 줌 내놓는 법 없이 며느리에게 받은 생선
비린내가 잔뜩 벤 두둑한 지폐가 담긴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옷핀으로 여민 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간다.“며 기인에 가까울 만큼의 부피의 나물과 며느리가
챙겨준 말린 생선들이 쌓인 보따리를 이고 지고 들고차고서야 집을 나셨다.
사람이 참 뻔뻔할 수가 있구나. 친할머니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다.
아픈데 없니? 괜찮니? 내게 물은 적 없던 할머니는 돈 밖에 몰랐다.
겨울 방학 초등학교 3학년쯤 남동생과 함께 아빠가 제사 지내러 큰아빠 댁에
올라가시면서 우리를 할머니 댁에 며칠 맡긴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지녔던 몇천 원을 잃어버린다는 명목으로 가져가셨고 돌려받은 기억이 없다.
대신 시장에서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윗도리와 많이 컸던 골덴바지를
사주셨는데 내게 가져간 돈보다도 적은 금액을 지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아서 자꾸 올라가는 윗도리와 커서 흘러내리는 바지를 입고 연신 끌어 내리고
추켜 올리며 할머니 손에 이끌려 집에 왔을 때의 엄마 표정이 잊혀지질 않는다.
우리 집 형편이 점차 좋아져서 집을 넓히고 선박을 키우고 땅을 늘려가면서 할머니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죽는소리를 했고 손을 벌렸다. 이루 말할 수 없던 여러 일 들이 있었다.
큰아빠의 아들인 사촌 동생의 생활비와 기거하는 집을 구하는 것까지 부모님이
신경 쓰셔야 했고 큰아빠의 제사는 지금껏 지내고 계신다.
친할머니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이가 갈린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치매로 요양원에 계실 때 아들들도 몰라보는 분이
내 엄마를 볼 때마다 멍했던 얼굴이 초점 밝아진 눈이 되어 반가워했고 손을 잡으셨단다.
”**엄마 왔구나! **는 이제 안 아프니? 시집은 갔니?“
생전 보인 적 없던 살가운 얼굴과 목소리로 반복적으로 물으셨단다.
그런 할머니를 뵙고 올 때마다 엄마는 내게 전화로 소식을 전하셨다.
”딴에는 마음에 걸렸던 건지 노인네가 나만 알아보고 네 소식만 궁금해하더라. “
할머니는 떠나신 순간에도 부모님의 마음을 시끄럽게 하셨다.
전남편의 자손들과 지인들, 재가한 남편의 자손과 그 사촌들과 지인들이 모인
장례식장에서 성이 다른 삼촌이 상주가 되어 관리하는 것을 지켜만 보셨던 고모가
제사는 우리 부모님께 모시라고 했단다. 그간 참았던 엄마의 분으로 인해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고 결국 장례비용의 절반은 아빠가 지불 하셨지만 제사는 성이 다른
삼촌이 모시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치질 수술로 퇴원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내방 침대 발치에서 계셨던 할머니의 모습과 말씀이 너무도 뚜렷하다.
작별을 고하는 것 같은 모습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대답을 했지만 거짓은
없었다. 할머니를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망하지도 않게 되었다.
친할머니 장례가 있은 몇 달 후, 친정에서 성이 다른 삼촌의 차를 얻어 타고 온 적이
있었다. 내 앞에서 늘 은연중 눈치를 보던 삼촌에게 말씀드렸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던 날 저를 찾아오셨을 때 ‘힘들지? 미안하다,’
라고 하셨던 말씀에 더는 원망하지 않는다고 편히 떠나라고 말씀드렸어요. 그 말씀
일부를 삼촌께도 하고 싶어요. 제게 더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일부러
작정하고 저를 다치게 한 건 아니잖아요. 운이 없었고 주어진 팔자가 그러했기에
벌어진 일이란 것을 진즉에 깨달았어요. 삼촌을 원망하지 않아요. 더는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고마워. 조카...“
누구보다 잘 살아내야 했기에 늘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살아왔다.
오히려 관리자가 내 눈치를 볼 정도의 근태와 실적을 보였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언행에 신중했고 때로 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