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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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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설거지


BY 박예천 2021-11-10

바람이 분다. 

누가 저 바람 앞에 낭만이거나 가을정취의 이름을 붙여주랴.

토네이도 급은 아니어도 가히 세상을 뒤엎을 만한 힘으로 뒤흔들고 있다. 

뒷모습을 보이기 싫은 가을의 마지막 발악일까. 

옆집에 고무함지가 떡하니 날아와 우리마당에 정착을 시도하고, 

안간힘 쓰는 나목들까지도 휘청거리며 뿌리로만 버틴다. 

이런 바람의 세기는 마치 형벌 같아서 지은 죄가 없는 이도 그저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마땅히 당해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설악산 굽이굽이 남아있는 갈잎들이나 마른나무 등걸까지도 다 뽑혀져 휘휘 날아

동해바다에 꽃잎으로 떠다닐 지경이다. 

도로를 주행하던 자동차가 좌우로 미끌거리기도 한다.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들썩이는 바람사이를 간신히 가르며 출근길에 나섰다. 

그나저나 집 나오기 전 바람설거지는 제대로 한 걸까.

 

유년의 기억 속 어머니는 먹장구름이 몰려오기 전 비설거지를 하셨다. 

장항아리 뚜껑을 덮고 마른 곡식들을 멍석 속에 다시 가두셨지.

바지랑대로 세워진 빨랫줄을 내리고 뽀송하게 마르지 않은 이불이며 옷가지도 걷어두셨다.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를 쳐다보며 왜 비설거지라고 했을까 머릿속으로 생각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하는 그릇설거지.

상황으로나 단계적으로 보면 정리의 끝 순서이다. 

아닐까? 순서를 바꿔 설거지를 일번으로 매긴다면, 

다음 끼니의 식사를 위한 세정식일지도. 

 

짧은 삶을 살아오며 나는 몇 번의 바람으로 허덕였을지.

미처 바람설거지를 하지 못해 망연자실 찢기고 주저앉았던 날들.

모진 바람 앞에서도 살아남아 다행인걸까. 

 

오늘도 미친바람은 또 분다. 

그 거칠고 황량한 바람사이로 햇볕 한줄기가 내리 쬔다.

오후의 정점에 피곤하게 앉아있는 나를 쳐다본다. 

창문을 열지 않아 다행이다. 

겨우 유리문 하나 닫아거는 것으로 나는 바람설거지를 마친다. 

앞뜰 오래된 밤나무가 남은 잎들을 끌어안고 모진 바람 앞에 춤을 춘다. 

광란의 바깥풍경과는 다르게 평온한 오후! 

졸음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