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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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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많은 나무지만 수월해서 고마워요


BY 만석 2020-12-05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 영감을 위해서, 작은 통의 김치를 하나 주방에서 미리 익혔다. 오호~. 냄새가 제법인 걸. 좀 짭조름한 냄새가, 영판 경상도 풍이다. 내 며느님이 경상도 양반골 출신이걸랑. 이제 때 맞추어 익으면 맛이 좋겠다. 누구라 거들어주는 사람도 없이, 그나마 처음 작정하고 애를 썼기에 대견하고 이쁘다.
"김장은 간이나 맞으면, 맛은 나게 되어 있어."이건 알량한 솜씨꾼 이 시어미의 자위렸다.

김장은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워놓았는데, 어줍잖은 이 시어미의 걱정이 한 꼬리를 문다.
"막내딸아이네 김장을 어쩐다? 너머지면 코 닿을 곳에 살면서, 경상도의 사돈댁에까지 김장 걱정을 하게 해서는 체면이 서질 않지. 해마다 내 손으로 치댈 때는, 혹시 솜씨 좋은 사부인에게 귀경길에라도 책을 잡힐라 싶어서, 애꿎은 양념만 축을 내질 않았던가. 올해는 그나마 며느님이 김장을 감당했으니, 사부인의 특별한 맛솜씨까지를 걱정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 막내딸아이네 몫으로 이름이나 지었으려나?

막내딸만 걱정이겠는가. 올해에는 막내아들 네도 귀국을 했으니, 그네도 한 걱정이로세.  맞벌이부부니 한 통만 가지면 겨울을 나겠구먼서두.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가득해서 넣어 놓고도, '내 것'이 아니지 싶어서 걱정이 늘어진다. 내 맘 같아서는 이 집도 저 집도,
"김장했다. 가져가라."하면 차 끌고 와서 실어갈 것을. 올해는 '임자'가 따로 있어서 속을 썩인다.

자~! 이만큼 고민을 했으면 이제 정리를 해야지?! 우선 막내며느님께 문자를 넣는다.
"며느님. 내가 올해는 몸이 시원찮아서 우리 김장을 큰동서가 했구먼. 너희는 김장을 어쩌려나?"
내 손이 굼뗘서 막내며느님에게서 답이 먼저 온다.
"어머니. 저희 지난 주일에 친정에 가서 엄마랑 김장했는데요. 왜요? 어머니. 김치가 없으세요? 주말에 가져갈게요." 이런이런. 내 손놀림이 굼떠서, 두어자를 입력하는 동안 줄줄이 또 글이 들어오고 이모티콘도 날아온다.
"아이고 어머니. 제가 김장하기 전에 여쭤봤어야 하는데, 제 생각이 짧아서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는, 눈물을 뿌리는 이모티콘이 아닌가 ㅎㅎㅎ.

"내년엔 제가 김장 담궈 드릴게요."
이런. 이 며느님은 제가 할 량이 아니더라도 제가 다 한다고 시원스런 답을 잘한다. 며느리도 아롱이 다롱이라더니 그래서 이쁘다.
"김장을 했다구? 나는 김장을 좀 가져가라고 전화했더니... 사부인께서 고생하셨겠구나. 가져오진 않아도 된다. 그럼, 너희들 김장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사부인 고생하셨을 터이니. 고기라도 사다 드려라. 그리고 내가 고마우시단다고 안부 전해라."
배추를 좀 사다가 김치를 좀 담궈다 주나 어쩌나 했더니, 한 시름 놓았다. 막내아들 네 김장이 해결되었으니, 이젠 막내딸아이 네만 해결하면 된다. 막내딸아이 네도 김치를 많이 먹지 않으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작은 것 한 통은 보내야겠지.

아니다. 딸아이한테 김장을 가져가라 하기 전에, 큰며느님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잖는가.  아직 9시 전이니 큰아들은 퇴근을 하지 않았을 터. 9시가 지나고 문자를 해야지. 아들이 힘을 보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다. 그래도 큰 며느님이 김치를 다 퍼날른다고 할 위인은 아니나, 거 참 내 맘 같지가 않다. 내 손으로 김장을 담궜더라면, 누구에게 묻고 자실 것도 없이 딸 네도 아들네도 걱정도 없이 나눠 줄 것을. 물론 말을 물어낼 큰며느님은 아니지만, 내 맘이 그렇지를 못하다는 말씀이야.

"에미야. 나, 할 말이 있어. 막내 네 김치 한 통 보내고 싶은데, 요번에는 네가 다 담궈서... 너한테 물어보고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고모내외가 우리 애기를 하도 잘 챙겨주고 이뻐하니, 김치라도 한 통 주고 싶어. 너도 이 다음에..."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다 적지도 못했는데, 문자가 날아온다.
"어머니. 저한테 그런 거 안 물어보고 주셔도 돼요. 어머니가 주시고 싶으실 때 편하게 주세요. 근데, 맛은 장담을 못해요." 그러면 그렇지. 내 며느님이 보통 위인이신가 ㅎ~.

"한 통 익혔는데 맛이 좋더라."
"다행이네요."
"이 다음에 우리 손주딸 시집 보내고 나면, 지금 내 마음 네가 알 거다."
며느님은 엄지척 이모티콘을 보내고 폰을 닫는다.

고마운 아이다. 생색을 내서,
"제가 전화를 할 게요."할 법도 한데 입을 닫는다. 욕심을 내자면, 제 동서네 김장도 걱정을 한 마디 했더라면, 내 마음이 더 흡족했을 것을.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쳐 생각이 거기까지 나가지를 못한 게 틀림없다. 아니지. 친정 어머니의 김장을 받아 먹는다는 걸 알면, 큰며느님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 더는 욕심을 내지 말자. 요만큼 서로 잘하고 사는 것으로 감사하자. 가지 많은 나무 치고는, 이만하면 그래도 수월하잖은가.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