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안에 있는 옷은 아예 잊은듯 입지를 않으시길래 , 어제는 입을 만한
옷들을 꺼내다가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어 어머님 주무시는 방 벽에다
좌아악 진열을 해 두었다. 작은 옷 가게를 운영해도 될 만큼 의외로 고급진
옷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둡고 칙칙한 옷들보다 밝고 화사한 꽃 무늬 옷들이
훨씬 더 많았다. 어떤 옷들은 너무 화려해서 어쩜 이런 옷들을 다 사셨지?
하는 생각이 잠시 들 정도였다.
마치 시골의 한 작은 양품점처럼 변한 방을 보니 행여나, 어머님이 왜
쓸데없이 옷들을 다 늘어놨냐고 잔소리라도 하시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오후에 센터에서 돌아오신 어머님이 잔소리는 커녕,
"어허어이, 뭔 옷이 이리 많디야아. 벽에 걸어논게 좋네. 내 맘대로 골라
입을 수 있어 좋네." 하셨다.
노인 돌봄 센터로 가는 차가 오려면 아직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아침
7시 반, 오늘은 벽에 진열된 옷 중에서 꽃분홍 꽃무늬 화려한 7부 셔츠에
남색 조끼를 걸치고, 주머니엔 지퍼가 달린 남색 바지를 골라 입으셨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적어도 반 년 정도는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으실 줄
알았는데, 아버님 49제 지난 이후 부터는 밝은 색 옷을 자연스레 입으셨다.
오늘은 꽃분홍인 거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방안의 서랍들을 열었다, 닫았다 하시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듯, 어제 입었던 바지에서 만원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들을 오늘
입은 바지 주머니에 그대로 옮기신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먹어야 할 약은 먹었는지 등, 사소한 것들은 다 깜박깜박 기억을 하지
못하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돈을 바지 주머니에 챙기는 건 하루도 잊은
적이 없으시다.
아침 식사 후 나는 커피를, 어머니에겐 꿀 넣은 대추차를 드리고 현관에
나란히 앉았다. 센터에서 오는 차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으로 들어올때 며느리 된 예의를 갖춘다고 검은색 계통의 옷만 가져
온데다, 계절에도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앉아 있으려니, 아침인데도
후텁지근하니 덥다. 젊은 나는 어둡고 칙칙하고, 연세드신 어머니는
화사하니 곱다. 어머니의 주름지긴 했지만 뽀얀 얼굴에 꽃 분홍 셔츠가
유난히 곱게 잘 어울린다.
" 어머니, 참 고우시네요. 아이유, 이렇게 곱게 차려 입으시니 며느리인
저보다 더 젊어 보이시는데요. 한 십년은 젊어 지신것 같아요." 나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순간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며, 수줍은 소녀처럼 쑥스러운듯 웃으시며,
" 늙은이가 곱기는 뭐가 고와아" 라곤 하셨지만 좋아하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며느리 칭찬을 확인이라도 하시려는듯, 현관 유리문에 비친 당신
모습을 요리 조리 살펴 보신다.
그리고 내 옷차림을 훑어 보시더니,
"너도 좀 옷을 고운 놈으로 입어라."
"아버님 돌아가셔서 일부러 고운 옷은 안 가져 왔어요."
"요즘은 엣날 같잖여어, 누가 그리 상복을 오래 입간디이? 너무 빨간 옷만
아니면 괜찮여어. 뭐이고 젊을때 고운 옷 입고, 맛있는것 먹고 혀어. 늙으면
뭘 입어도 안 예쁘고, 뭘 먹어도 맛이 없어. 너두 돈 너무 애끼지 말고 옷 좀
고운 놈으로다가 하나 사 입어라." 하신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 한동안은 우울증에 빠져 씻는 것도, 옷을 갈아 입는
것도, 머리를 감고 빗는것 조차도 하지 않으시려 해서 걱정 이었었다.
듣느니 한숨 소리 였었는데....
요즘 말씀도 좀 많아지시고, 성격도 많이 밝아 지셨다. 그건 아마도 세상에
혼자 남겨진듯 나 이제 어찌 사나 싶으셨을텐데, 가까이 사는 시동생 내외가
주말마다 찾아오고, 큰 며느리인 나도 당분간 옆에 있겠다 하니 마음에
안정을 찾으셔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센터에 다니시는 효과도 있을것이다. 또 하나, 슬프게도 기억을
잃어가는 효과( 요즘 들어 아버님에 대한 얘기는 거의 안 하신다.) 이기도
할 것이고....
9남매의 맏이인 아버님과 결혼하셔서 시부모님 모시고, 평생 농사 일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신 어머님의 남은 시간이, 늘 평안 하시면
좋겠다.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시고, 좋았던 일들만
기억하시길, 어머님 방 벽에 걸린 고운 옷들 골고루 다 입어 보시길,
곱다는 칭찬에 기분 좋아하며, 유리문에 얼굴 비춰보던, 여자인 어머니의
모습을 오래 간직 하시길 바래 본다.
오늘 아침.
그 누구도 개입되지 않은 어머니와 나 둘만의 시간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니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