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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병동에서


BY 가을단풍 2020-02-18

   우리 아버지!
나에게 가장 변함없는 사랑이 조용히 내곁을 떠나가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버지를 지키면서 이제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덜 고통 받으시고 조용히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버지의 병원생활이 시작된것은 지남 2014년 2월이었다.
이른아침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느 병원으로 호송되느냐는 말을 건뇌던 남편이 나를 휠끔 휠끔 처다보았다.
그 시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시리라는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그야말로 눈물이 역사를 이루었다.
목수술을 두번이나 하신후에 전신마비가되어 온몸이 장작깨비가 되어버렸다.
길고 긴 고통속에 재활을 하신후 어느만큼 회복이 되어갈때
어머니의 지병이 탈이났나보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 아버지를 상처한 홀아비를 만드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는 홀로 남겨진 교통사고를 당하여 몸이 부실한 아버지를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할뿐 이것 저것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나름 아버지를 정성껏 돌보았다.
만사를 젯껴 놓을수는 없었지만 공부를하면서도 사이사이 돌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보아도 아버지에게 찾아온 도독놈을 지키지 못했다.
세월이 가는 사이 어느새 아버지 몸에 도독놈이 들어와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것은 그렇게 병원을 자주 다니고 검사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그렇게 도독놈이 자랄줄은 몰랐다.
의료진이 원망스러웠다.
그도독놈을 잡기위해 좋은약도 쓸만큼 쓰고 정성도 들이고 시간도 바쳤지만
도독놈은 잡히지 앟고 아버지의 몸에서 세력을 더욱 크게 쌓아가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몸이 부실한 아버지!
  도독놈이 꽤냐 여럿놈이 극성을 부리는 아버지!
너무 슬펐다. 이렇게 고통스워울 인생이었다면 차라리 그때 교통사고 났을때
돌아가시는 편이 나았다.
우리 아버지가 상처한 홀아비가 된것도 용서할수 없는 일이건만
온 몸에 노독놈들이 득실 득실 하다는 것을 더 용서할수가 없다.
그러나 그 도독놈을 지킬 재간이 없었다.

 지난해 년말부터 부쩍 몸이 나빠지셨다.
의사들이 호스피스를 권장했다.
깨진 똥단지...
아무지 받쳐들어봤자 생기는 것은 도독놈들이 만들어낸 오물뿐이었다.
신장이 망가져서 오른쪽 신장에 삽관을하여 그곳으로 소변을 빼낸지가 일년정도 되었다.
이제는 아버지의 그곳에 관을 꼽아 혈뇨를 빼내고 있다.
그래도 그것까지는 참을만 했다.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암환자의 통증이라니 말로 표현할수가 없었다.
대소변은 전혀 더럽지 아니했다.
새빨간 혈뇨도 적응이 되었다,
그러나 적응할수없는 것은 아버지의 통증이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침상에 누워 고통을 호소하는 아버지를 끌고 함께 광란하며 병실 복도를 질질 끌고다녔다.
마약을 맞은후 한시간이 넘어서야 멈추었다.
부모의 애끓는 고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고통인지 ...
내 혈압이 170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소화가 안되어 죽만 먹었다...

  어쩔수없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갈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보내는 것같아 안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항암치료와 심폐소생술를 거부하는 싸인을한후 이곳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곳이 이렇게 편안할수가 없다.
첫째 고통이 없다. 호스피스 천국이었다
통증을 호소하면 금방 마약을 주입해주었다.
어쩌면 통증이 생기기도 전에 약간의 신호만 오면 그대로 주사를 투여했다.
지금은 통증도 멈추었다.
식사를 완전히 끊었었는데 미음을 드시라 했다.
살짝 산책도 하시고 계시다.
얼마나 사실지 모르지만 편안히 돌아가실때까지 편안하시고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고요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