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림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휴양림을 돌아보며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철암의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그곳은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지형을 이용해서 하천 쪽으로는 버팀목으로 지지대를 만들어서 받쳐놓고 건축을 한 까치발 집과 상가들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곳이다. 한때 그 지역의 경제가 집약되어서 활기가 넘쳐났던 철암 시장의 번화가였다. 하천 쪽으로 화장실을 만들어놓고 용변을 보면 하천으로 떨어지는 까치발 집을 구경하면서 그 시절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묵호나 동해 쪽에서 들어오는 기차가 기적소리와 함께 도착하면 머리에 또 아리를 틀어 얹고 그 위에 커다란 생선 다라이를 힘겹게 이고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와 역 앞에 펴 놓고 떠들썩하던 한 무리의 어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험만 보면 1등을 도맡아 하는 아들 생각에 소매가 반들반들 한 스웨터를 입고 온몸으로 비린내를 풍겨도 연신 웃고 다니던 뒷집 미순 이 엄마가 겹쳐 보였다. 간주가 나오는 날이면 시장이 활기로 넘쳐났다. 똥개도 만 원짜리만 물고 다닌다던 경제 부흥기에 손톱 밑은 항상 덜 지워진 석탄이 검게 남아 있지만 만족한 웃음으로 웃고 다니던 우리의 아버지들도 있었다.
추억이 돋는 그곳을 거쳐서 우리가 두 번째로 다시 만나 함께 살았던 곳 남동 사택으로 향했다. 이 친구와의 인연은 특별해서 혹시 우리가 전생에 부부였나? 하고 생각할 정도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11살이 되던 4학년 때 까지 앞뒷집 이라 할 만큼 가까운 곳에 살았었다. 헤어지고 나서 18세 가 되어 우연히 바로 뒷골목에 살고 있는 친구를 다시 만났다. 지금 같은 통신이 전혀 없으니 그대로 끊길 수도 있었는데 만나야 할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것인가 보다. 다리가 넓혀지면서 입구에 있던 사택들은 모두 헐리고 없어 졌지만 우리가 살던 집은 그대로 남아서 누군가 살고 있었다. 친구가 그럼 우리 집은 어디냐? 묻기에 기억을 더듬어 찾아냈다. 누군가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골목 이었구나? 친구의 혼잣소리를 들으며 구문소로 향했다.
오 억년 고생대의 신비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 했다. 그 곳은 장성과 철암을 오가며 가끔 지나치던 곳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뚫어 구멍을 만들어 놓았는데 반드시 그곳을 통과 해야만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도로 옆으로 하천이 있는데 천천히 흘러내리던 하천이 자연으로 뚫어진 커다란 바위 아래서 소용돌이로 바뀌면서 수심도 깊어진다. 천연 동굴 아래로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는 물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에는 수 억 년 을 견뎌온 바위들이 생태계의 신비를 간직한 채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지나칠 때 마다 신비한 곳이라 생각했었다. 문득 어릴 때 이곳을 오가며 느꼈던 슬픈 심정이 되 살아나 가슴에서 문풍지 같은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지형과 함께 물 위에 하나 도로에 하나 두 개의 바위 구멍이 있는데 물 위에 바위구멍은 자연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도로에 것은 일본인들이 수탈을 용이하게 하 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뚫은 것이라 했다.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산책 코스를 마치고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11살까지 친구와 내가 함께 살던 곳을 찾아갔다.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간 곳에는 집이 없었다. 반면 예전에 부러워하던 읍장님 네 집은 형태 마 져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집을 찾는다며 둘이 수런거리는데 나이 많은 할머니가 오시더니 무얼 찾느냐 묻는다. 저기 있던 집이 없어졌다고 하며 저 집은 읍장 네 집이 맞는지 묻자 맞다 한다. 무려 오십년이 지난 집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대로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지붕만 까만 새기와가 얹혀있었다. 우리 집에서 나와 느티나무를 끼고 골목을 돌면 있던 친구의 집도 없어졌다.
누군가 이층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바로 앞의 집을 가르치며 자신은 이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집에 살고 있다면서 느티나무도 없어졌고 두레박 샘은 메워졌다며 친절히 설명한다. 집은 없어졌지만 집 뒤로 야트막한 오솔길을 오르면 제일교회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읍사무소가 있었는데 교회도 그대로 있고 읍사무소는 교육지원 청 이란 팻말이 붙어있었다. 여기에 엄청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는 친구의 말에 그때도 그렇게 컸으니 필시 고사 했을 것이라 했는데 고목이 되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무를 쓰다듬으며 네가 지금까지 여기를 지키고 있었구나? 장하다! 속삭였다.
어린 시절 종이인형을 연필로 그려서 가위로 오려가며 놀던 상고머리 계집아이가 60이 되어서 종이인형을 나누던 친구와 함께 추억을 더듬는 여행이라니 꿈만 같다.
어려운 시기를 살아내면서 그 시절의 감정들을 소환하는 특별한 여행 이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 도 중요 하지만 누구랑 가느냐? 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를 먹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을 실감했다. 행복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유년시절은 없었지만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기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