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56

생선 한점에 사랑을 싣고


BY 귀부인 2019-04-17

20대의 나는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긴 생머리에 차분한 인상을 갖고 있어서인지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로부터 며느리 삼고 싶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던거 같다.
한번은 버스 옆자리에 탄 어느 할머니께서 자기 아들 소개해 주시겠다시며
내 팔을 잡아 끌며 같이 내리자고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젊은 남자 사람들한테는 그닥 인기가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대학 다닐때 비록 전공을 한것은 아니지만 재미로 공부한 일본어가 통,번역을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졸업전 운좋게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되고 그 회사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1시간 전에 출근하여 일본어 강의를 했다.
내 수업에 들어오는 수강생들 중엔 과,부장님들도 계셨지만 절반 이상은 패기에 찬
멋진 신입 사원들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무언가 가르치는 선생님이 존경받던 시절이라 비록 학교는 아니지만
내 강의에서 나이는 가장 어렸어도 모든 수강생들이 나를 깍듯이 선생님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 당시의 나는 생기 발랄함보단 차분함 내지는 점잖함(?),빈틈없는 완벽주의자였다.
모시던 실장님은 종종 내게
"김양아, 너무 맑은 물엔 물고기가 놀지 못한다.그러니 적당히 실수도 좀 하고 빈틈도 있어야
남자 친구도 생기지."라고  말씀 하시곤 했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젊은 신입 사원들에게 있어 사귀고 싶은 매력적인 아가씨가 아니라
어쩌면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선생님이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든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난 남자 친구가 없어도 딱히 외롭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남자들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지 못했다해서 크게 아쉽지도 않았다.
그냥 난 젊은 사람들에겐 별로 인기 없는 스타일인가보다하고 생각했다.
게다가 결혼에 그닥 관심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중에 돌연변이 젊은이 하나 있었으니.....
수업 시간에 엉뚱한 질문과 대답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ㅎㅎ 지금의 내 남편이다.

남편이랑 함께 산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도 가끔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 나 아니었으면 아직까지 결혼도 못하고 처녀로 늙어 죽었을거야.
나 한테 고맙다고 절하고 살어."라고 하며 생색을 낸다.
그럴때마다 나는 무슨 소리하냐고 펄쩍 뛰지만 속으론 솔직히 그랬을수도 있겠다는,
또는 결혼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곤한다.

남편 집으로 첫 인사를 가던 날이 생각난다.
나뭇잎들이 막 옷을 갈아 입으려던 어느 초 가을,햇살 따듯하던 날이었다.
리본이 달린 새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색 우단 물방울 무늬 긴 플레어 치마 단정히 차려입고
시댁으로 인사를 갔다.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나니 예비 며느리 인사 온다고
아침부터 준비하신 정성 가득한 밥상을 내오셨다.

그러나 긴장한 탓에 잘 차린 밥상의 반찬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복스럽게 푹푹 밥을 떠먹어야 할텐데 마음과는 달리 마치 젓가락질 처음 배운 어린아이처럼
반찬을 제대로 집지도 못하고 깨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안스러웠던지 남편은 큰 며느리감으로 마땅한지의 여부를 판가름 하시기위해
매의 눈으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찬찬히 살피시는 시부모님 앞에서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보며,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생선을 정성스레 가시발라
내 밥 숟가락위에 턱 하니 올려 주는게 아닌가?
고맙다기보단 어찌나 민망하던지....
나도 모르게 시부모님 눈치 한번보고 물 한잔으로 목구멍에 걸린 밥과 생선을 억지로 삼켰다.
과묵한 큰 아들의 색다른 모습에 우리 시어머니 엄청 놀라셨을텐데 그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가끔은 궁금해진다.

인사를 다녀간 후 내 허리가 너무 약해보여 저 허리로 애기를 낳을수 있겠냐고
걱정을 하셨다 한다.그러나 시부모님들 우려와 달리 연년생 두 아들 순풍 순풍 낳고
그 약하던 허리도 이젠 제법 두툼해졌다. 

결혼 30여년을 바라보는 지금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던 사업이 잘 풀리지않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을때도,아플때도,고통스러울때도,
기쁠때도,그리고 삶이 힘들어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을 퍼부을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와 남편은 그 모든 순간에 늘 함께였다.

아이들이 떠나고 둘만 남고부터는 별 할 말도 없고 때론 서로 무심함이 쌓여
습관처럼 함께 사는 그저그런 날들이 이어질땐
가끔씩 시부모님 앞에서 내 밥 숟가락에 가시 발른 생선을 올려주며
밥을 떠먹여줄 기세였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디갔나,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던 그 눈길을, 그 사랑을 이젠 잃어 버렸나,
이 남자가 이리 무심하게 변하도록 난 무얼 놓치고 살았나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나는 남편은 늘 변함없는 사람이란걸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다.
지난해 휴가차 한국에 들른 나와 남편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날마다 기력이 약해지시는
시부모님한테만 집중하자 싶어 짧은 한국 방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시부모님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팔순을 넘긴 시부모님들과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식사를 하는데 ,
오래만에 아들 며느리랑 밥을 먹어서 입맛이 좋으시다며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시는 모습이 참 좋았던것 같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후 시어머님은 서천 장날에 나가셨다가 잘 말린 박대를 사오셨다.
생선 좋아하는 큰 아들 먹이실 요량으로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 사오신게 분명한,
도톰한 살이 꾸덕하게 잘 마른 박대를 노릇하고 먹음직스럽게 구워 밥상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날 남편은 30여년 전에 그랬던것 처럼 우리 둘만 사는 집에선
결코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굳이 그것도 시부모님과 나란히 마주 앉은 밥상머리에서.

노릇하게 잘 구워진 박대 한토막 가시발라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 내륙 지방에 살아 잘 모르지? 이 생선은 이 부분이 특별히 맛있는 부위야."
하며 내 밥 숟가락에 올려다 주는게 아닌가!
첫인사때 그려셨듯 시부모님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셨지만, 왠지 민망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슬쩍 시부모님 눈치를 살폈다.


'아니,이 사람이 진짜 도대체 왜 집에서는 하지 않는 행동을 굳이 시부모님 앞에서 하는거지?,
결혼한지 오랜 세월이 지난만큼 이젠 생선 뜯어먹는게 그리 힘들지 않을만큼 시부모님들과
이물없는 사이가 되었는데.....'
하는 생각이 살짝 스쳐갔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시부모님과 밥을 먹을땐 각별히 나한테 신경을 써준거 같다.
시부모님과 함께 식사할땐 외식을 하든, 집에서 먹든 늘 맛있는 반찬 있으면 먹어보라고 권하고,
심지어 내 앞으로 반찬 그릇을 당겨 주기까지 한것 같다.
어려운 자리에가서 밥 먹는거 끔찍이 싫어하고 ,화나면 숟가락 놓고 밥 부터 먹지않는
성질머리 고약한 마누라한테 많이 먹고 살찌라 노래 부르는 남편이고 보면
어쩌면 남편은 은연중에 아직도 내가 시부모님을 어려워해 편하게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세월이 흘러 시부모님과 이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곤하나 친정 엄마와 함께
밥을 먹는것만큼 매 끼니 맘 편히 밥을 먹지는 못한것 같다.

그날 시부모님 앞에서 민망하긴 했으나 30여년 전과는 달리 내 밥 숟가락에 올려진 잘 구워진
생선 한점을 맛있게 먹었다.
그렇지만 흰 머리 듬성난 큰아들의 살뜰한 마누라 챙기는 모습을 보시고
시부모님은 무표정하게 아무일 없던듯이 식사를 하셨지만, 속으론 과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못내 궁금하고 또 민망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그 생선 한점에 뭐 그리 대단한 의미를 두냐고.
하지만 그날 내게 생선 한점은 단순한 생선 한점이 아니었다.
앞으로 둘이 살아갈 많은 날에 남편이 혹여 나를 서운하게 하거나,미운일 할때 잔소리 안하고,
미워하지않고, 기회될때마다 시부모님 더 잘 챙겨드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게한,
변함없는 남편 사랑을 확인한,그래서 나를 행복하게한 생선 한점 이었으니....

훗날 내 아들들이 결혼을 해서 나와 함께한 밥상머리에서 각자의 아내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게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하게 될까?
아마도 난 흐뭇한 미소를 지을수 있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