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짧고 여름이 길어졌다. 그렇게 자주 내리던 눈도 비도 언제부터인가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메르스가 우리나라에 상륙하더니
한지에 실수로 검은 물감을 떨어트린 듯 번지고 있다.
이럴 땐 다른 방법이 없다. 집안이 제일 안전한 안전지대가 된다.
원래 거의 집에만 있던 나는 갑갑하지 않지만 볼일이 많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든
밖에 나갈 일이 많은 사람들은 고립된 듯 답답할 것 같다.
지하철도 식당도 관광지도 사람이 없다는 뉴스를 접하며
나는 저번주도 어제도 오늘도 출퇴근만 하고 저장음식처럼 집안에 은둔해 있다.
거의 모든 날들을 혼자 보내는 난 혼자 차를 마시고,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서 하는 취미생활을 하게 되었다.
과거나 현재 미래로 떠날 수 있고, 사람 마음속이나 자연 속에 깊숙하게 들어 갈 수 있어서
나는 책을 많이 본다. 최근에 본 책 중에 제일 경악하고 재미있었던 책은 ‘언브로콘’이었다.
세계2차대전 때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실화를 사실대로 쓴 책인데,
영화로도 올해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림에 관심이 많아 옷에도 벽에도 그림을 그리고,
요즘은 직장 다니느라 못하지만 수 놓는 것도 좋아해 옷에다가도 수를 놓아 입고 다니고,
액자도 만들고 선물도 했다.
꽃을 좋아해 집안에는 물론 아파트 뜰이나 일터나 엄마네 정원에 꽃을 많이 심어줬다.
그것도 요즘은 여건이 안되어서 안하고 있지만 내가 일한 곳은 어디나 꽃을 심었다.
집안에서 뭐든 하다 보니 집안을 차 마시기 좋고, 책보기 좋은 분위기로 만들어 놓았다.
사실 돈을 많이 들여 가구를 사거나 꾸민 것이 아니고,
화분에 유리를 맞춰 티 탁자로 쓰고, 화초를 수경재배하고,
정리정돈을 깨끗하게 해 놓고 음악을 틀어놓고 훌라후프를 돌리고,
꼭대기 층이라 베란다로 깊게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맞이하고,
저녁의 하늘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곤 한다.
난 남들보다 ‘행복해요’를 내보이고 싶고, 과시하고 싶어 과거엔 입이 근질 근질거렸지만
지금은 자랑 질을 떠벌떠벌 떠버리가 되려 해도 젠장할! 가진 것이 별로 없다.
중년쯤 되면 좋은 타를 타고, 남들처럼 삼십평대 아파트에 살 줄 알았더니
어머나! 맙소사! 난 차도 없고, 복도형 작은 평수에 태평하게 앉아 있다.
남보다 좋은 옷을 사고, 남들처럼 멋진 해외로 여행하고 싶지만 제기랄! 난 그런 여건이 부족하다.
그러나, 원망한들 한탄한들 짜증낸들 누가 알아주겠나.
작지만 난 내 집이 좋다라고, 최면을 걸기로 했더니
이 작은 공간에서 책을 통해 세계여행을 하고, 성공한 멋진 인생을 대리만족하며 살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세상 돌아가는 사건과 사소한 생활들을 같이 수다 떨듯 대화를 나누고,
예쁜 화초와 내가 만든 장식품과 내가 정리한 살림살이를 통해 자아도취, 자뻑을 한다.
며칠 동안 뉴스에선 메리야슨지 메리슨지 계속 그 무서운 얘기만 나 들으라고 떠들어댄다.
확! 텔레비전을 껐더니 텔레비전은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있다. 안보고 안 듣고 말 안 했더니 속이 좀 편하다.
이럴 땐 맛있는 거 해 먹고, 책보고, 멀리 베란다 창 하늘을 보고,
으싸으싸 팔다리를 움직여 맨손체조를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