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나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몸이 쉬는 동안에도 머리를 굴렸고, 머리가 멈춰있는 동안에도 몸은 뛰었다. 물론 달리다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파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난 엄마였으니까. 늘 부족한 엄마임을 부끄러워해야 했던 내게 ‘나 자신’을 위해 달리기를 멈춘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리고 달리면서도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육년쯤을 지나있을 무렵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늘 혼자인 첫아이가 안쓰럽다는 이유로 둘째를 낳았지만, 갓난아이가 생기면서 그렇지 않아도 숨 가쁘게 돌아가던 일상은 아예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정신이 없는 건 엄마인 나 뿐만이 아니었다. 바쁜 딸과 며느리 대신 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양가 어머님들까지 총동원되셔야 했다. 입사한지도 10년차를 바라보는 터라 회사일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지만, 쇠약하신 몸으로 애들을 돌보고 계시는 어머님들께 아이를 넘겨받을 때는 마치 어디서 놀다오기라도 한 양 죄스러웠다. 이뿐이 아니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가까워져 가면서는 ‘워킹맘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소외당한다더라’는 동료 여직원들의 걱정 섞인 푸념도 마냥 남이야기처럼 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이러고 있는 걸까? 역시 아이들을 위해 회사를 포기해야 하나?’하는 마음이 회오리바람처럼 온 몸을 휘져어 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이었다.
둘이 벌어도 빠듯한 벌이도 그랬지만, 그동안 공부다 일이다 이런 저런 핑계로 제대로 익혀본 적이 없는 가사를 전담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게 더 솔직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만 보면 눈에서 별이 떨어진다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벅차게만 느껴지는 것도 선뜻 회사를 그만둘 엄두를 내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였다. ‘살림도 육아도 이렇게 서툰 내가 집에 들어앉는다고 별안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나마 돈으로라도 엄마역할을 대신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 아닐까? 게다가 이대로 집안에 들어앉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애 키우고 살림하겠다고 그렇게 기를 쓰며 공부하며 일했던 건 아니었는데...엄마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포기하기엔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난 역시 엄마자격이 부족한 걸까?
그렇게 ‘일’과 ‘아이’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한숨만 쉬고 있을 무렵,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늪 안에 이미 깊이 빠져있다는 좌절스런 자각에 이르렀을 무렵, 감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질문이 나를 찾아왔다.
‘일도 아이도 다 중요하다 치자. 그런데 정작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울 너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니? 네 인생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니?’ 처음엔 무시하려고 애썼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했던 거다. ‘잡 생각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아직 남는 힘이 있다는 말이잖아’ 하며 더더욱 나를 몰아붙여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익숙한 듯 낯선 듯한 그 목소리의 훼방은 날이 갈수록 더 집요해져만 갔다. 야. 너 왜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너는 엄마잖아. 엄마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피 같은 잠을 줄여가며 24시간을 낱낱이 해부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한가하게 ‘나’를 찾으러 다닐 여유 따위는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펼쳐진 나의 하루 안에는 지칠 대로 지친 여인이 두 아이를 안고 업은 채 회사와 집을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피곤이라는 갑옷을 입고 행복이라는 화장을 한 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으로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내주고도 늘 더 줄 수 없음을 미안해하는 이 가여운 여인의 비굴함이 슬퍼서 울었고, 이건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며 억울해하면서도 정작 뾰족한 대안을 주지 못하는 무능함이 서러워서 또 울었다. 나중엔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른 채 그냥 꺼억꺼억 소리내서 울었다. 엄마가 되고는 엄마라서 흘리지 못하고 삼켜 온 눈물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느라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 박미옥을 귀찮게 하던 그 집요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의 ‘자아’였다는 것을. 어느 날 난데없이 찾아온 것 같았던 그 질문은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해 놨던 탓에 나 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져버린 ‘자아’가 마지막 힘을 짜내 보내는 S.O.S 신호였다는 것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
나의 육아휴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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