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그해여름도 많이 더웠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그여름에 부도라는 이름이 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이름도 생소한 화의신청에 들어갔다.
정말 고마운 회사
매달 10일이면 어김없이 월급이 나와 우리가정을 눈부시게 가꿔준 회사
간간 시집 한권씩을 사면 내 감성을 지켜준 회사
월급날이면 아이들에게 통닭 한마씩 안기며 아이들을 환호하게 만든 회사
그리고 8남매 맏이로 동생들 결혼시키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게 한 회사
그 회사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이름도 더 낯선 IMF라는 거대한 공룡이 우리나라를 덮었다.
남편 회사의 동료들이 떠나고..
남은 남편도 괴로워하던 때였다.
적금을 깨고 보험을 해약하면서 고2 중3 두 아들과 함께 이겨나가려 노력하던 때였다.
아들들 학원도 한군데도 보낼수 없이 그저 불안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어쩔수 없이 아랫집 동생네와 시장입구에서 계란빵 장사를 하기로 했다.
오전에는 동생이 저녁에는 나와 남편이 찬바람 가득한 시장입구 포장마차에서 계란빵 장사를하고
저녁이면 깡통에 들어있는 동전을 쏟아놓고 세는 일과를 거듭하고 있었다.
계란빵 장사는 참 많은 추억을 남기고 봄이되면서 접었지만
우리인생의 귀중한 힘이 되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그래서 생긴 프로그램이 TV장터였다.
IMF를 이겨내기 위한 방안으로 아나바다 운동이 시작되었고 방송도 시국에 맞춰
아나바다 장터를 열기로 한것이다.
토요일 오전 7시50분부터 8시50분 까지 한시간 방송
지역 농산물 코너도 만들고 지역의 중소기업 상품도 만들고
무엇보다 지역의 부녀회나 단체들이 내놓은 재활용품을 만들어 필요한 소비자에게 파는
장터였다.
화물차 한대를 섭외해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부녀회나 단체에서 모아놓은 재활용품을 수거하러 다녔다.
각 부녀회원들이 생방송으로 출연해 물건 판 대금을 가져가 이웃돕기에 쓰는 아주 따뜻한 방송으로 만들어
가자는 취지였다.
물건을 모으는건 어렵지 않았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동사무소에 전화하면 부녀회를 통해 재활용물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보자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건을 수거하러 가면 나를 아줌마라 불렀다.
아줌마 이것도 실어가고요
실은 후 청소좀 해놓고 가셔요 라든지
아줌마는 어느 재활용센터에서 나왔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그냥 웃었다.
간혹 화물차 아저씨가 작가님..이라는 설명을 해주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수거한 재활용품은 대다수가 천원 2천원에 팔렸다.
그 동 부녀회장이 나와 그 동네 부녀회의 활동상황도 이야기하고
이웃돕기 이야기도 하고 회원들의 친목도 다져나갔다.
그 이른 시간에 물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공개홀을 가득 메웠다.
TV장터 문을 엽니다..하고
사회자가 외치면 먼저 사는 사람이 임자였다.
문제는 간간 물건을 돈을 안내고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중소기업 상품을 홍보하는 장이 되었고 지역의 농산물을 홍보하는 자리가 되기도 해
나름 지역방송으로는 자부심이 큰 방송으로 자리매김 해 갔다.
그런 1년 반..
나는 고물상 아줌마라는 닉네임으로 재활용품을 수거하러 다녔고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에서 벗어나면서 이 방송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 많은 단체들이 기꺼이 참여해 주셔서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주셨고
나눔의 의미와 아나바다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단결이 잘된다.
금모으기 행사때도 그랬고 IMF때도 그랬고
올해는 최악의 전기부족으로 더위를 맨몸으로 맞서야한다.
또 잘 이겨나가리라 믿는다.
*다행이 2001년 8월 23일, IMF로부터 빌린 195억달러를 모두 갚으며 불과
3년 8개월만에 외환위기사태, 즉 IMF사태가 공식 종료된다.
*남편의 회사도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 30여년을 근무하고 무사히 정년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