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붉은색이 거리를 뒤덮었다.
대한민국의 축구가 16강을 올라갔고 8강의 기쁨을 누리던 그때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꿈이 이루어진 4강신화를 이루었다
안정환의 패널트킥의 실수를 만회한 화려한 반지키스를 그라운드를 돌며 날리던 16강을 지나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이 있는 그날 나는
군에가 있는 아들을 면화하려 경기도 모처에 와 있었다.
큰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남편차에 아들과 아들 여자친구를 태우고 의정부로 가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
그때는 아들을 둔 엄마로의 멋진 체험이란것은 까맣게 잊고 늘 같이있던 아들과 떨어진 다는것만 슬펐다.
큰아들 6학년때 방송작가가 되었다.
그러며 늘 바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때도 엄마는 늘 바빴다.
그 당시 고등학교때 도시락을 두개씩 싸야하던 시절 ..동생도 있었으니
매일 도시락을 세개씩 싸는것이 벅차던 때였다.
반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엄마였다.
체육복도 제때 빨지못한 엄마였다.
그런 아들이 군대에 간다니 잘못해준 것만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아들을 훈련소에 놓고 대전까지 내려오면서 울었다.
아파트 마당에 들어서서 또 울고 잡에와 아들방을 보고 울고 아들이 입던 옷 책 모자를 보고서도
울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메일로 보내놓은 어머니 아버지 울지 마셔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 글을 보고 또 울고..
아들을 보내놓고 100일동안은 매일 손편지를 보냈다.
지금이야 군대홈피가 있어서 아들들의 훈련상황도 보고 사진 올려놓은것도 보고
글도 남길수 있다고 하는데 불과 몇년전인 그때는 손편지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들에게 답장이 오면 읽고 또 읽고 그러다 울고..
그 아들이 훈련소를에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다.
이등병을 달고 일병을 달고...
그 유월의 어느 오후 아들 면회를 가게 되었다.
아들과 자고 다음날도 함께 보내고 내려올 요량이었다.
방송 준비는 다 해놓고 원고까지 써 놓고 왔기에 마음도 편했다.
아들과 부대근처 거리를 걸으며 느긋하게 보내고 그저녁 아들과 신나게 8강전을 응원했다
그날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환호에 가득했고 아들은 마음놓고 월드컵 축구를 보았다고 좋아했다
올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홍명보 선수의 승리의 골이...아들과 나를 갈라놓았다.
다음날 아침 아들과 즐겁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피디였다.
아..이작가님.. 방송 포맷을 바꿔야겠어요.
우리나라가 4강에 올라갔잖아요
거리가 온통 붉은 물결이라서요..저는 지금 그 광경를 찍으러 나갑니다
체육교수인 누구씨 섭외해야하고 응원단장 섭외해야하고..
원고 다시써야 하고 편집대본도 써야하고....
그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들과 저녁까지 먹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아들은
엄마 가셔야 겠네요...괜찮아요. 얼른 가세요
쓸쓸히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들을 부대까지도 데려다 주지 못하고
거리에 세워 놓은채로 내려와야 했다.
백미러에 비치는 손 흔들고 있는 아들의 모습
다른 군인들은 부모와 손잡고 아직 거리를 다니고 있는데
그곳에 아들을 우두커니 세워두고 돌아와야 했다.
남편은 아들을 한 번 힘차게 안았다.
돌아와 나는 그밤을 새웠다
느닷없이 여러분을 섭외 해야했고 대본을 써야했고 편집원고도 써야했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방송은 무사히 나갔다.
작가님 회사에서 밤새우셨다고요?
그게 힘든게 아니었다.
아들을 거리에 놓고 내려온 마음 그게 힘들었다.
그때 처음 엄마가 작가라는게 미안했다.
이제야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작가엄마라서 미안했어.
*그아들은 지금 결혼해서 예쁜 딸을 낳고 우리아파트 뒷동에 살면서
매일 손녀를 데리고 와서 놀다 돌아간다. 참 고맙고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