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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찍던 날


BY 그대향기 2013-03-15

 

 

“엄마, 우리도 가족사진 찍어요.”

며칠 전 상병을 달고 휴가 나온 아들이 다짜고짜 가족사진을 찍자고 했다.

전에도 여러 번 그런 말이 나왔지만 남편이 응하지 않아서 무산된 일이었다.

딸들도 찍자고 했지만 남편은 매번 거절을 했다. 이번에는 두 딸도 거들었다.

“아빠, 목의 흉터는 감쪽같이 없애달라고 하면 돼요.

온 가족이 오늘처럼 다 모이기도 힘든데 이번에 꼭 찍어요. 네?”

정말 결혼한 딸하고 객지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까지 다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명절 때도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일인데 이번에 어쩌다보니 온 가족이 다 모이게 되었다.

아들은 군에 가서 수첩에 애기 손바닥만한 가족사진들을 넣고 다니며

보는 선후배들이 부럽더라고 했다.

아이들의 성화에 나도 기회는 이 때다 싶어 한마디 했다.

“다 늙어 파파할머니할아버지가 된 가족사진보다는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찍어서 애들 남겨줍시다.”

 

남편은 20년째 가족사진 찍기를 거부하고 있다.

늘 아내인 나보다 몸무게도 덜 나간다며 몸무게를 나보다 더 늘려서 찍겠다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면서 거절 했다.

남편이 가족사진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남편의 목에 남은 수술자국 때문일 것이다.

꼭 20년 전에 남편은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했다.

요즘은 진주 목걸이를 하면 티도 안 나게 감쪽같이도 한다더니만  남편의 종양은 어느 정도나 컸기에

알파벳의 \"H\" 자가 누운 모양으로 턱선 바로 밑에와 쇄골 부분에

길게 생긴 수술자국이 지금도 선명하다.

말을 할 때면 그 수술자국이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지렁이처럼 보인다.

수술자리를 만져보려고 하면 질색을 한다.

흉터부분의 감각이 정상적인 피부하고는 전혀 달라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남편이 잠들었을 때 쓸데없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살짝 만져보려고 했다.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심하게 화를 내는 바람에 다시는 만져보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심했더라면 부부싸움을 할 뻔했다.

목울대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중심선은 흉터가 더 굵고 넓고 도드라졌다.

화상 환자에게서나 보임직한 피부 당김의 흉터가 남편의 목에 길게 남아있다.

그래서그런지 남편은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목선이 둥글고 깊게 파인 옷이나

 \"v\"자로 파인 티셔츠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여자들처럼 손수건이나 스카프를 두를 수도 없으니 옷을 살 때는

항상 목 부분을 최우선적으로 살펴보며 골랐다.

아무리 결혼한 남자라도 그렇지 어떻게 수술자국을 그 정도로 심하게 남기면서 수술을 했을까?

옷을 입으면 안 보이는 가슴 부분이나 등 부분도 아니고 얼굴 다음으로 가장 눈에 잘 띄는 목인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혼자 피씩 웃었다.

남편한테 갑상선 암이 발견되고 수술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어떤 모습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기도했던 생각이 났다.

 

그 날은 서른세 번째 맞는 내 생일이었다.

그 며칠 전 아침에 남편은 면도를 하다가 목에 잡히는 멍울을 발견했다.

불안한 마음에 아내한테는 숨기고 혼자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했고

그 결과가 잔인한 생일선물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 때가 막내가 막 돌을 지났고 남편이 하던 사업이 빚만 남긴 채로 접었을 무렵이었다.

빚도 빚이었지만 남편의 암 소식은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행히 암 중에서도 수술 후 생존율도 높고 다른 암에 비해 후유증도 다소 적어서 양반이라는

갑상선에 생긴 암이어서 얼마나 감사하냐며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동아줄을 잡은 심정이었다.

꺽꺽꺽... 전화를 붙들고 친정엄마를 부르며 터져버린 통곡은 쉬 그쳐지지 않았다.

400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 온 연로하신 친정엄마의 양말짝은 색상이 맞지 않았다.

단춧구멍이 맞지 않는 철 지난 쉐타를 입고 오셨다. 

지병인 심장병이 도지셨던지 목에서는 연신 색색이 새가 울어대는 소리가 났다.

어린 삼남매를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남편을 수술실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아주 짧게 입맞춤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된다고 빠르게 속삭였다.

수술실 앞에서 6시간 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  밖에 설치 된 상황판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리지도 않은 손바닥을  두 무릎사이에 넣고 싹싹 비볐던 기억이 난다.

그 날은 길지 않았던 내 생애 중에서 가장 더디고 길었던 하루였다.

 

수술 후 몇 년에 걸쳐서 독방에 갇히는 동위원소 치료를 여러 번 받았고 17년 만에 재발해서

재수술을 받았지만 다행히 암세포의 전이는 아니었다.

수술을 하면서 미용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완전제거를 하느라 그랬던지

남편의 수술 후 흉터는 칼 댄 자국이 30~40 cm는 넘는 것 같다.

목 부분을 완전히 열어 젖혀 두고 해부수업을 하고 닫아 놓은 흔적처럼 이리저리 어지럽다.

아니면 완전 초보 의사가 경험삼아 수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억지추측을 해 본다.

주변에 갑상선 암을 수술한 사람들의 흉터가 남편처럼 크고 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남편을 마주 볼 때 마다 배부른 투정이 생기곤 한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어느 날 수술 후에 찍은 스냅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한결같은 자세를 발견하게 되었다.

항상 오른쪽 얼굴을 정면으로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왼쪽 목선에 흉터가 있었던 남편은 의식적으로 오른쪽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보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갑상선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살이 잘 찌지 않다보니 남편은 흉터도 흉터지만

마른 모습으로는 가족사진을 절대 찍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늘 봐서 편한데도 본인은 한번 사진으로 남게 되면 지울 수 없는 증거로 남는다며 거절을 했었다.

몸무게가 어느 정도 늘어나면 찍겠다고 버텼다.

그런 중에 남편은 기흉을 두번이나 겪었다.

나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라는 심정이 되어 혹시라도 운 없이 다른 장기로

전이라도 되었나 싶어 늘 조마조마하게 남편을 지켜봐야만 했다.

덩치에 안 맞게 애교를 부려가며 가족사진을 찍자고 한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그렇게 되면 안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남편한테 지금보다 더 나쁜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정말 아이들한테

제대로 된 아빠의 모습을 남겨주지 못 할 것만 같았다.

 

그런나 20년이 지나도록 남편의 몸무게는  원하는 만큼 늘지 않았다.

아들은 수첩에 넣고 다닐 가족사진을 이번 휴가 때 꼭 찍고 싶다고 했다.

둘째 딸도 며칠 후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떠나게 되면서 가족사진을 갖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꿈쩍도 않고 버티던 남편이 마음을 움직였다.

마침 큰딸도 외손녀를 데리고 동생들을 만나러 와 있어서 마음을 보태게 되었다.

사위까지 함께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하는 일이 월말이면

더 바쁜 일이라 안타깝게도 빠지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온 가족이 제주도에 가서 일출봉 앞에서 올망졸망 찍은 가족사진 말고는

사진관에서 찍는 가족사진은 이번이 처음이다.

둘째의 제안으로 옷을 통일했다. 윗도리는 흰 남방에 바지는 청바지로 하기로 했다.

정장을 입으면 표정까지 굳어지기 쉽다며 편안하면서도 깔끔하게 입었다.

결혼 28년차 인 엄마아빠가 청춘남녀들처럼 젊어뵌다며 너스레를 떨어서 유쾌하게 웃었다.

돌박이 외손녀도 가족사진을 위해 청바지와 흰셔츠를 준비했다.

늘 카메라 앞에서는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지던 남편인데  카메라기사의 능숙한 자세교정과

긴장을 풀어주는 재치있는 말솜씨에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외손녀까지 개나리 같은 환한 웃음을 날려 준 멋진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사진이 나온 날 치열교정이 덜 끝난 둘째가 실물보다 밉게 나와 아까웠지만

가족 모두가 활짝 웃고 찍은 만족한 가족사진이었다.

물론 남편의 목은 사진관에서 친절하게 솜씨를 부린 덕분에 흉터없이 매끈하다.

대나무 무늬의 액자에 반듯하게 넣은  다음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을 걸어 놓았다.

오랜 숙제를 푼 듯 기분이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