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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1 -언니의 여행에 동행하기로 하면서 한생각.-


BY 이안 2011-10-30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29일 세 명이 내장산 단풍구경을 가기로 했는데 내 집에서

하루 자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거절할 이유가 마땅히 없다. 그러라고 했다.

너도 함께 가면 어떻겠냐는 말에 것도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동행하기로 했다.

헌데 기분은 묘하다. 언니가 알고 지내는 일본인 여자가 동행한다는 말 때문인

거 같았다. 낯선 타인 두 명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도 어쩜 날 묘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고 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함께 가자는 말은 운전기사 노릇을

해달라는 말이군. 아무튼 그런덴 잘도 부려먹어. 그렇다고 싫지는 않다.

드라이브를 나름 즐기는 체질이라 크게 망설여지지도 않는다.

헌데 일본인 여자가 낀다는 말이 나를 마구 흔들어댄다.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 삼국시대 이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온 해안가 노략질,

일제강점기 전부터 시작되어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이어진 역사의 아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위안부 할머니들, 마루타, 윤동주 같은 시인을 잃게 만들었던

생체실험, 사과할 줄 모르는 오만함, 독도 망언 등등 일본과 관련된 부정적인

사건들이 줄줄이 내 기억 속에서 끌려나온다. 그러더니 한 번 본 적도 없는 그 일본인

여자의 몸에다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한다.

 

그 뿐이 아니다. 이번엔 난 그 여자의 상을 끌어다놓고 줄줄이 묻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한 나라의 왕후를 시정잡배들을 끌어들여 난도질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와 중국 사람을 상대로 마루타 또는

생체실험을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죠? 어린 여자들을 끌어가 일본군

병사들의 욕구를 채우는 노리갯감으로 만든 것은요?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사과할 줄 모르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뻔뻔함으로도 모자라 독도 망언까지

일삼는 행태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죠? ……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일본인 여자의 허상을 앉혀놓고 내 머릿속은 이런 물음들로

와글와글하다. 그런 중에도 한편에선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나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고. 언니가 불편해하겠지? 그걸 떠나서라도

그 여잔 내 이런 물음을 자기식으로 마음에 담아두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한테

풀어놓겠지? 그러면 일본인 관광객들이 썩 좋아하지는 않겠군. 우리나라 아이돌에

대한 열광도 대단하다던데, 것도 피해를 입을 수 있을지 몰라.

이제는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친다.

 

참아야 되는구나. 속을 다 드러내면 안 되겠구나.’

 

난 입단속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도 난 자유롭지 못하다. 앞서 했던 생각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러면 난 또 내 머릿속의 그 여자를 붙들고 물어댄다. 얼굴도 형체도 없는 그 여잔

말이 없다. 입을 꾹 다물고 뗄 줄을 모른다. 그런데도 난 멈추질 못한다.

그 때마다 난 내가 단군의 후예라는 것을 떠올린다. 우리 선조들이 겪은 억울함을

기억하고 있고, 사과라도 받아 그들의 한을 다소나마 덜어주고 싶은 한민족의

후손이라는 생각으로 합리화시킨다.

그럼에도 내 생각들이 불쑥 뛰쳐나올까봐 걱정은 된다.

게다가 그게 미뤄지는 한 일본인에 대한 나의 이런 생각은 변할 거 같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