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대 부부가 자살을 했다.
처음 듣는 소식은 아니다.
오십대에 그 소식을 들었을때에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자식 가슴에 못을 밖다니.. 자식에게 못할 짓을 했어.\"
지금 육십대 중반의 나는 그 소식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오죽하면 죽었을까.\"
남편은 치매환자이고 아내는 암환자인 부부가 택할 길은 죽음 밖에는 없었으리라는 깊은
이해까지 동반하고 슬픔으로 다가와 눈시울을 적신다.
이제는 그것이 남의 일일수만은 없기때문이다.
자식에게 폐를 끼칠수가 없다는것이 이유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네 육십대에 자식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걸까.
자식의 생활에 피해를 줄수 없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자식을 바라본다.
예전에 부모들은 당당했다.
자식의 잘못된 처사에 화를 낼 줄도 알았고 요구 할 줄도 아는 부모들이었다.
시대가 변하다 보니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자식이 소리없이 잘 살아주기만을 바라는것은 흔한 이혼의 추세에서 온것인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수 없는 부모의 설 자리는 이미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혼자 살다가 갑자기 병이 나면 어찌하는가 하는 문제는 나 역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다.
나의 죽음을 책임져줄 상대가 누구인지 꼽아보아도 아무도 없다.
양로원을 선호하는 이유가 아마도 죽음을 맞는 준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늙어간다는 일은 슬픈 일이다.
의지할곳이 없다는 사실은 더욱 슬프다.
어버이날 아버지에게 가야하기때문에 엄마에게는 못간다는 아들의 전화도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엄마 아버지가 따로 있게 된 사실이 미안하기도 했다.
어머니 서운하셨지요 묻는 오늘 며느리의 전화에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아니어야만 한다.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씩씩하게 홀로 서기를 하는 시어머니다워야 하기때문이다.
잘 늙어야 겠다는 생각보다 잘 죽어야 겠다는 생각이 앞지른다.
잘 죽을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