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바쁜 시간에도 이렇게 귀한 걸음 해 주신 여러 어르신들 반갑고 감사합니다.
해마다 5월 어버이날은 찾아오지만 지난 해와 똑 같은 어버이날은 아니시지요?
마치 누군가에게 도둑 맞은 것 같이 없어져버린 젊음.
제트비행기보다 더 빠르게 휘리릭~날아 가 버리는 시간들.
허투루 마구 쓰고 버려지는 하수구의 구정물처럼 아끼지 못했던 소중한 시간들.
그래서 자꾸만 앞으로 남은 날들을 셈해보게 만듭니다.
어린 날에는 얼른 어른이 되어서 마음대로 돈도 써보고
세상을 이리저리 살아보리라 마음먹었었지만
정작 그 어른이 되어보니 마음먹은 대로 세상은 느긋하지만은 않으셨지요?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어르신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꽃말처럼 사랑과 감사가
우리 자식들한테 일년 내내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부모가 되면 내 아이들은 이런저런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 보리라던 굳은 맹세도
내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우리 부모님들께는 이렇게 저렇게 효도하겠다던 당찬 맹세도
이루어진 것 보다는 이루지 못한 게 더 많은 일들 천지라 해도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어르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하신 게 있답니다.
바로 부모님이 되신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이 자식을 낳아보는 경험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했습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그 뒤에는 먹이고 입히며 키우고 교육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는 큰 부담이 뒤따르지만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누구누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집장가를 가면서 또 누구누구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자식이었을 때는 부자가 못 되었던 부모님들이 원망스러웠던 적 없으셨는지요?
뭐든지 원하는 것은 다 사 주시지 못했던 늙고 가난하고 찌들고 세련되지 못했던
부모님들을 미워했던 적은 없으셨던지요?
저는요.....
그런 제 부모님들이 너무너무 야속했던 어린시절이 있었답니다.
5남매 막내로 태어난 저는 철들 무렵부터 엄마는 늘 늙으신 모습이셨구요
아버지께서는 군기피자로 만주까지 피난가셨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셨고
친구 일을 도우시다가 한쪽 눈까지 실명을 하고 하루하루 세상을 원망하시다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가셨답니다.
공부를 썩 잘하던 학생은 아니었지만 운동 잘하고 한 덩치했던 저는 학교에서
이런저런 감투는 꽤 많이 썼던
요즘 아이들 말로 짱~잘 나가던 학생이었지요.
그런 제가 집안이 어려운 걸 표나게 하면서 살아가기란 어린 나이에도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답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아버지는 우리 오남매를 낳기만 하셨지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안 시켜주시고 애들 학비는 아랑곳 하지않았고
약주외상값이 아버지의 월급보다 더 많았던 기억밖에는 없었답니다.
아버지의 현실감각은 바닥에 가까웠고
엄마는 언제나 어린 자식들 학비며 양식걱정에 하루도 몸과 맘이 편할 날이 없으셨지요.
이집 저집....
아침마다 돈 꾸러 다니시던 엄마의 작고 초라한 모습.
그런 엄마를 보시고도 안면 몰수하셨던 야속한 아버지.
그러나 엄마는 강했습니다.
결혼하고 제대로 된 월급봉투를 거의 안 가져다 주시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막노동부터 농사일까지
안 해 본 일 없이 엄마는 돈이 되고 양식이 되는 일은 다 하셨지요.
남의 밭을 빌려서 시금치 농사도 지으셨고 단을 묶어서 장에 내다파시던 엄마.
큰 제재소에 소나무가 들어오면 소나무껍질을 벗겨서 땔감으로 쓰셨는데
엄마 키보다 더 크고
엄마 몸보다 몇 배는 더 굵은 소나무의 껍질이 더 두껍다고
소나무를 굴리시다가 소나무에 깔려서 죽을고비도 수없이 넘기셨던 엄마.
온 몸엔 시퍼런 멍투성이에 생채기에서는 제 때 치료를 못 받아 피고름이 흘렀지만
어린 자식들을 추운겨울에 불기없는 얼음장같은 냉방에 재우게 될까 봐
매서운 칼바람이 어설픈 옷자락을 헤치고 들어와도 절뚝절뚝....
아픈 다리를 이끌고 다시 소나무껍질을 벗기셨던 엄마셨습니다.
현실성없는 남편을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엄마 스스로 가장이 되셨고
엄마 혼자 어린 자식들을 건사하는 전사같은 엄마가 되신 겁니다.
엄마니까.
세상의 그 어떤 이름보다도 아름답고 처절한 이름.....
엄마니까.
천사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엄마니까.
그런 엄마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제 아버지를 참 많이도 원망하며 자랐던 제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부모들이라도 어쩌지 못했던 일들은 있으셨겠구나
싶은 조금의 이해는 가게 되더군요.
부모는 절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감사하신 분들인데 아버지의 시행착오가
꼭 아버지 혼자만의 죄처럼 느껴지던 제 어린 날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지금은 제가 잘못 생각했던 지난 날을 용서 받고 싶어도
제 아버지는 26년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우리 가족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고 엄마청춘을 송두리째 앗아가시고도
엄마한테 끝끝내 미안했었더란 말 한마디 안 남기셨지요.
미안하고 고마웠었더란 그 한마디대신 단발마의 고통을 피울음으로 참으셨던 아버지.
그게 엄마한테 드리는 마지막 인사였고 예의셨던가요? 아버지......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버지께서 외동딸을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시며 지어주셨던 이름으로,
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하나 밖에 없는 그 딸이 낳은 큰 딸이 또 자식을 낳을
어미가 됨을 아버지께 알려 드리면서 아버지 살아 생전에 못 구한 용서를 빕니다.
철없던 그 어린 시절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저와 제 가정을 지켜주세요 아버지.....
제 어머니는 올해로 여든 일곱이십니다.
꽃다운 열여덟에 시집오셔서 44년을 아버지하고 사셨지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꼭 26년을 더 사셨답니다.
죽음이 그리 서러울 연세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제겐 엄마가 지금의 연세보다
배를 더 사신다해도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애들 키우느라 효도다운 효도를 마음 놓고 못해 본 제가
한숨 돌리고 효도를 해 드리고 싶은데 엄마는 서서히 제 곁을 떠날 채비를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계시는 듯 보이십니다.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제 눈에서는 안개 비만 내렸습니다..
그 안개비는 엄마한테도 같이 내리는 희한한 비 같습니다.
그런 안개 비라도 자주 내리는 날들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제게 주신 가장 큰 교훈은 처자식을 목숨처럼 아끼는
남편을 구해야 한다는
분명한 교훈이셨다는게 눈물겹도록 감사하다면 너무 억지일까요?.
그래서인지 지금의 제 남편은 세상의 그 어떤 남편보다도 저와 세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아끼는 진짜 남편이요 아버집니다.
큰 부자여서 행복한게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튼튼하게 지켰고
결혼 후 단 한번도 월급봉투를 안 가져다 준 적이 없었습니다.
처자식을 전심을 다해 책임질 줄 아는 그런 남편이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엄마라는 자리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이 수반한다 해도
자식들을 지키고 품어야 한다는 것이구요.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나 생활고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자식들을 안고 수 십 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동반자살을 하는 요즘의 몇몇 매정한 부모들을 보면 가난과 사랑의 부재 속에서도
우릴 버리지 않았고 동반자살을 하지 않고 이만큼 키워주신 우리 엄마가
더욱 더 감사하고 위대해 보이십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제게는 그 어떤 어려운 역경이 닥친다 해도 이겨 나갈
강한 생명력과
인생의 모진 비바람이나 거친 풍랑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갈 용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 시절에 엄마가 아버지와 저, 우리 오빠들을 버리고 떠나셨더라면
저의 이 글은 많이 달라져 있겠지요.
한 작은 여자아이에서 엄마가 되고 그 엄마가 자식과 남편을 위해 기꺼이 버린 청춘은
한 알의 썩어진 밀알이 되어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는 기쁨과
부족하나마 이런 글을 올리는 영광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멀리 경주에서 막내오빠와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한 엄마는
딸의 이 애끓는 글도 듣지 못하십니다.
위로 세 형님들이 계시지만 엄마를 모시고 살아가는 막내오빠한테 지금까지는
미안해서도 못했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오빠.
사랑하고 또 감사합니다.
오늘 오신 어르신들도 처음부터 농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셨지요?
이제는 너무 오래된 직업 같은 농부가 천직처럼 느껴지시는지요?
몸은 좀 힘들지만 농부라는 직업이 얼마나 근사한 직업인지 모르시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농부는 정년이 없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는
덜 할 것 같은데 어떠하신지요?
젊었을 때는 해 볼만했는데 이제는 힘에 좀 부치시지요?
그래도 누구 눈치 안 보고 혼자서 뭘 심던지 경작하시는 1인 전문경영인들이시잖아요.
비록 새벽 어둑발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슬을 밟으며
한 포기 두 포기 한 뿌리 두 뿌리
쓰다듬고 바로 세우고 잡초를 뽑아줘야 크는 일 많고 잔손질 많이 가는 농사일들이지만
정직하고 어르신들이 땀을 쏟은 만큼 정직하게 소출이 나는 기쁨을 주는 땅.
그 땅은 평생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어르신들을 기다리는 상록수같은 친구잖아요.
친구는 슬픔을 같이 짊어지고 가는 게 친구랍니다.
슬픔도 함께 기쁨도 함께하는 친구인 땅을 지키시는 어르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십니다.
세상의 가장 근본을 다스리시는 분들이십니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셔도 충분하십니다.
이제는 비록 구부정하고 땡볕에 거을러서 거칠어지고 주름이 깊이 패인 얼굴이지만
그 허리로 그 얼굴로 길러낸 자식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두 번 째가라면 섭섭할 자랑스런 명품들이지 않습니까?
병원이 멀고 교통이 좀 불편한 이 시골에서 한 사람의 당당한 몫을 감당하게하기까지
길러내시느라
날마다가 긴장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그런 날들이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놀이공원의 청룡열차처럼 희비의 순간들이 수도 없이 교차하는 날들이셨지요?
이마가 조금만 따뜻해도 부모 가슴은 먼저 타들어 갔고
숨소리가 조금만 거칠어도 부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어린 생명을 품에 안고 하얀 밤을 노심초사 지새웠고 농번기 때는 아이가 아파도
얼른 들쳐업고 병원에도 가지 못했던 그 안타까움.
손바닥만 한 그늘도 차일인양 젖먹이를 눕혀 놓고 널뛰듯 밭 몇 고랑의 김을 맬 동안
그 손바닥만 한 그늘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오뉴월 땡볕이
보드랍고 연약한 아이를 볕으로 구워 놓았습니다.
보드라운 젖먹이는 빨갛게 익어 따갑고 배고픔에 자지러질 듯이 울어댔을 겁니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에 호미자루 밭고랑에 내 던지고 얼른 젖먹이를 안고
퉁퉁 불은 젖을 먹여 보지만 울음 끝이 서러운 아기는 눈물에 콧물까지 범벅인체
딸꾹질을 하느라 젖꼭지도 얼른 물지 못합니다.
젖먹이와 새댁이 같이 우는 모습에 남편 분은 그저 먼산바라기를 하며
애꿎은 담배연기만 허공에다 내뿜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어르신들의 사랑과 희생을 먹고 잘 자랐습니다.
양파의 속살처럼 뽀얗던 피부가
갓 찧어서 가마니에 담던 쌀알처럼 통통하고 복스럽던 어머니들의 손이 마디가 굵어지고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힌 꺼칠꺼칠한 손이 되셨지만
거짓없고 성실한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담긴 자랑스런 손이십니다.
젊음은 사라지고 꽃미남은 비록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되어버린 얼굴이시지만
세상 그 어느 미남보다 빛나는 어르신들의 얼굴이십니다.
가을날 누렇게 익은 황금들판에 서서 환~하게 웃으시는 그 웃음은 세상을 다 얻은
진정한 승리자만이 웃을 수 있는 멋진 웃음이십니다.
..
아버지 어머니.
그 동안 수고가 참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나 운다는데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은 얼마나 고되고 험한 일이었겠습니까?
어르신들이 지키셨고 다져 놓은 이 나라 이 땅에서 어르신들의 자식세대 우리 세대들은
행복할거고 또 우리의 후손들도 행복할 겁니다.
남은 남들 동안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들만 추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드립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쫴끔 더 행복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노루꼬리만큼씩만이라도 더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두서없는 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이 귀한 인연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로 이곳 면민이 되었던 제가 벌써 쉰을 넘기고
외할머니가 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저도 가슴에 카네이션을 덜 부끄럽게 달아도 될 나이인 듯 합니다.
내년 어버이날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를 빛내주시리라 믿고 이만 줄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
고맙습니다..
( 이 글은 지난 주에 이웃 동리주민들을 모시고
어버이 날 행사를 하면서 가장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마을 어르신들께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