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965

너거 시어미 땜에 내가 밤새껏 울었다.


BY 그림이 2011-03-27

나의게 83세의 시숙어른이 계신다.

내가 수술 받은후로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전화를 주신다.

우연찮게 가산을 탕진해서 시어님께 미운 오리털이 되어

시어머님이 저 세상에 가신 후도 형제분들끼리 편치 않는 관계다.

그러니 아내들이 덥석 시아주버님 편에 서서 남편들을 설득 시키려고 하지를 않는다.

자연 시부모님 제사때도 오가질 않는다. 동서들끼리 몰래 가려도 눈치가 보여

그냥 뜻을 따르는것도 아니고 집구석 조용 하자고  시어머님이 가신 후 내왕을

끊은지가 이 십여년이 되어온다. 그런데 가장 가깝게 사는 나는 처음엔 아이들만

데리고 제사때 큰댁엘 갔다. 큰 형님을 따돌리려고 맘먹었는데 나 때문에

형님이 기가 죽지 않는다고 어느날 한소리들은 남편은 나와 싸우려고 대들었다.

나 역시 당신땜에 시어머니께 살가운 정을 못받았다. 하지만 애들보기도 도리상

가야된다는 의무감에 간다. 그러고 시아주버님이 노름을 했다던가 기집질을 해서

가산을 탕진한게 아니잖아요. 우연찮게 운이 없어 잃은재물 꼭 그렇게 해야되나요?

많이도 생각한 남편은 그 후로는 둘이 어떤때는 혼자서라도  제사에 다녔다.

자연 큰집 과에 관계는 좋아졌다. 두째 시숙 눈치보느라 그랬는지 우리집을 통해

제수를 보내는 집도 있었다. 그래도 명절이고 재사때는 아예 걸음을 하지 않는다.

바로 위 시숙이 결혼할때 까지도 부모재산을 타고 나왔다.

우리결혼하기 직전에 사고가 나서 남편이 제일 부모님께 유산을 받지 못했다.

불평을해도 우리가 제일 많이 할 처지인데 첫째와 둘째가 제일 못 지낸다.

부모같은 시숙이시다. 그 당시 대학을 나오신 분이라 아주 박식하고 한문, 일어

동양사 세계사 막힘이 없을 정도여서  며느리들이 큰아버님께서 놀랄정도로 

유식하시다면서 선조의 대한 가풍, 가족내력도 감명깊게 해주신다고 좋아했다.

운이  따라주질 않아 실력 발휘를 못하다 늦게 교직에 취직이 되어 교감으로

정년을 하셨다. 년금을 선호하던 때도 아니고 어른모시고 여러남매 키우면서

살던때라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시금으로 타서 빚갚고 얼마남지 않는 돈으로

생활하신다는 정도로 알고  작은 아들이 결혼하던 때 부터 아들에게 일렀다.

처음엔 내돈으로 주면서 앞으로 큰아버지가 얼마나 오래 사시겠느냐?

설, 추석, 일년의 두번씩 각각 10만원씩 드려라 그 후로는 저들돈으로 아들형제가

명절때마다 20만원씩 드린다. 작지만 시숙어른은 너무 고마워 하셨다.

그러다 내가 암이란 선고를 받고 오실려는걸 겨우 말렸다.

나아서 꼭 찾아뵙겠다는 연락을 드리고 차일피일 지금까지 왔다.

며느리가 제사에 가니 질부야! 너거 시어미니 아프다는 말듣고 내가 밤새껏 울었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사리분별이 확실학고 집안을 일으킨 분이다.

라는 과찬의 말씀을 며느리 듣는데 하셨기에 며느리가 어머니는 좋겠습니다.

큰 아버님이 그렇게 잘  봐주시고 우리 한태 잘 해드리라고 당부하셨어요.

세분의 시누이댁도 부산이라 걸음이 쉽지않아 남편이 잘 데리고 가질않고

명절때도 두 아들 가족이 가면 내가 끼일 자리가 없었다.

24일에 10박 11일 남편이 동유럽 여행을 갔다. 새벽에 보내고 나는 부산으로 갔다.

친정부모를 찾아가듯 지팡이를 짚고 아파트 정문에서 기다리시는 큰 동서를 보고

눈물이 확 났다. 자네 얼굴 보자 생각보다 좋구나 눈물이 글썽하신다.

양주 한병과 소고기를 좀 넉넉하게 사들고 간 나의게 이렇게 오면

자주 못온다고 하시면서 밤새껏 힘들었던 시집살이를 이야기 해주셨다.

몰랐던 일도 많았다. 남편과 가면 이런 이야기는 못 하셨다.

요즈음 아들들 마누라한태 꼼짝  못하고 또 애들 뒷바라지에 힘들어

부모용돈에 힘든다고 하시는 말씀에 가슴이 아팠다.

이튼날 그 연세에 차를 몰고 기어이 생선회를 사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 내가 내면되지 하고 따라나서니 아주버님이 화를 내신다.

죽을때까지 몇번 보겠나 자주보자 라는 말씀을 뒤로두고 며칠 놀다가

가라고 하시는걸 성당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노부부의

꾸부정한 모습으로 아파트 정문까지 나와 손을 흔드시는데 눈물이 났다.

집에와서 핸드백을 열어 정리하는데 (약봉지 화장품 세면용) 가방 제일

밑바닥에 하얀 봉투가 있었다. \"나도 자네한테 여비 한번 줘보자 \" 맏동서 

형님형편에 적지도 않는 오만원이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형님하고 전화를 거는데 눈물 부터 먼저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