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이 전화가 왔다.
이혼해서 딸과 둘이사는 친정질부가 딸을 하늘나라로 보냈단다. 초등학교 6학년인 글라라는
세례명을 가진 오빠의 손녀가 3월2일에 갔다고 친정 큰 질녀가 동생집에 와서 얘기했다고 했다.
그게 끈이라서 언젠가는 다시 합쳐지겠지 라는 가느다란 희망이 아이가 가는 바람에 영 끊어지나
싶어 눈물이 났다. 고부갈등이 이혼으로 이어져 그맘이 더욱 짠하다.
질부에게 전화를 냈다. 질부야 이게 무슨소리고 라고하니 고모님 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전화로 둘이서 눈물바다가 됐다. 시고모인 우리가 보기엔 질부가 착하다고 생각한다.
질부이야기 들어면 질부편 시어머니 이야기 들어면 시어머니편, 그러나 친정올캐 언니마져
시고모인 우리를 보고 아무게고모! 우리동생이 어쩌면 저렇게도 복받을 짓을 못하는지
그 착한 신랑속을 끓이더니 자식마져 갈라서게 한다고 할 만큼 우리가 보기에도 과한듯 했다.
처음엔 조카가 이혼후 날마다 술이취해 있다고 하더니 날이가니 새장가 가려고 하는 찰라 아이가
간 모양이다.
날이면 날마다 아들은 보험회사 사원, 엄마는 보험회사 설계사 둘이가 한직장으로 날마다 출근했다.
마누라보다 엄마와 늘 붙어 다녔다. 지방이라 전근도 없었다. 자연 며느리 나쁜점만 이야기하니
처음엔 엄마를 이해하고 불평은 나한태 하라던 조카는 여동생 셋에 엄마까지 여자 넷 말을 흘러버리지
못했다.그중에도 제일 큰 시누이는 올캐입장을 이해했지만 혼자서 불감당이었다고 한다. 42살 미혼
시누이 38살 미혼시누이결혼한 딸마져 5년이 되어도 아이가 없어 자연 친정걸음이 잦았다고 한다.
혼자 보육교사로 키우던 질부는 시고모인 우리한태 고모님 혼자살면서 잘 키울께요.공부도 잘
한답니다.영민한 아이는 아빠엄마가 이혼한데 대해서 너무 고민을 하는지 우리가 보아도 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길래 처음엔 지방의사라 그런지 별거 아닌것처럼 말해
예사로 있었는데 더 아프다고 해서 서울 종합병원에 가니 아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어른이
앓는 간암말기가 폐에도 전이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다라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는
질부의 흐느낌이였다.
그토록 힘든일을 왜 혼자서 감당했나 우리한태라도 연락하지 라는 말에 아버지는 병원에 몇번
왔지만 큰 시누이가 아플때 한번오고 다른시누이와 할머니는 한번도 병원에 오지않고 죽은 후
시누이 둘은오고 할머니는 끝내 이혼한 며느리가 보기 싫었는지 오지 안했다는 말을 듣고 참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엄마제사에 가니 머리가 아파 제사 못지내겠다던 언니가 며느리본 후 며느리가 제사 음식 골고루
장만하니 살림 말아먹게다고 호통쳤다는 언니다. 큰 딸이 동생보고 그런다고 했다. 엄마 딸로
태어난게 부끄럽다고 고모 왜 아빠가 엄마와 결혼했나요. 가문을 중요시여기면서 사람도리를
으뜸으로여기는 아빠집과 영 반대쪽인외기와 어떻게 결혼이 되었느냐고 묻는다고 했다.
오빠가 살았을때 한 말이다. 처형하고 장인장모는 그렇지를 않다고 그리고 처제도 착하다고
혼자 유독 저렇게 독하다고 하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질부와 합칠 여건은 점점 멀어져갔다.
신랑을 싫어하지 않는 질부는 그래도 이혼한 신랑이지만 신랑편을 든다. 경제권을 거머쥐고 있는
엄마말을 거역못하는 남편이라고 오빠가 살았을때 돈도 많이 벌고 시골집재산 일원 한푼 손 안대고
오빠가 간 후 친정아버지 재산으로 있는재산 동생과 나는 자식하고 잘 살으라고 두말않고 도장 찍어주고
그대로 물러주었다. 조카도 우리고모들같은 사람 없다고 처음에는 고마워했다.
위자료도 넉넉히 줄 시어미가 아닌줄은 안다 역시 그 짐작이 적중했다. 열심히 살겠다던 질부는
세상이 무섭단다. 아이를 납골당에 안장하고는 날마다 아이한태 간다고 했다. 우리로서는 할말이 없다.
어디가든 갈 살아라는 말 밖에는 정말 어른들이 갈라서면 이렇게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이 자리를 빌어서
하고 싶은 말이다.누구나 이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하지만 커는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인지 내 가까운 사람을 보고 나도 이혼을 작정한 사람이라 잘 참고 살았다는 생각이 오늘 더 절실히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