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는 잠실의 곱창집.
이제 어디를 가도 상관없어졌다.
저녁 한끼 먹으며 얼굴 본 것으로
그 이벤트의 막을 내릴 작정이었으니까.
2011년 2월에 만난 그와 나는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후 만난 적이 없던 그의 생각은 나의
20대에 멈춰 있었고나도 완벽한 내 남자였던 그의 20대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와 헤어진 이후
더 어려워진 형편에서도 대학에 입학한 나는
술 따르고 몸 파는 일 외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했다.
취업한 다음 경제적인 부분이 다소 해결되면서
배고픈 사람 찬 물에 밥 말아 먹듯
가난으로 좌절되었던 가슴 속 열정을
배움이라는 방법으로 표출시켰다.
덕분에 2개의 추가 학부전공외 다양한 분야의 민, 관 자격증을 가질 수 있었고
호기심과 적극적인 성격이 빚어낸 경력은 나이와 함께 성장했다.
출판사에 근무하며 학원을 운영하고
회사에 출근하면서 기업체 강의를 나가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면서 또 가게를 운영했다.
그 사이에 또 틈이 나면 새로운 분야의 교육을 받고 경력을 쌓으며
나 조차 설명하기 힘든 복잡하고 버라이어티하게 살아 온 지난 날들을
몇 시간 만에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기란 애초에 불가능 한 일.....
이해시키려는 노력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서로를 모른 채 나누는 대화는 민망스럽게 겉돌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우린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내 이름은 000이며 취미와 특기는… ’하는 식의
자기소개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다르다는 걸, 서로에 대해 모른 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는
함께하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그의 취미와 특기가 골프라면 나는 도예와 사진촬영....
그가 골프를 즐기는 휴일이면 나는 자동차에 자전거를 매달고
해변으로 나가 남편과 자전거를 타며 휴일을 보내는 식이다.
그가 ‘산사춘’이라는 술을 시켰다.
그의 잔에 술을 채우고 내 잔에도 술을 채웠다.
약간은 쑥스럽고 어색한 건배를 하고
만나서 꼭 해주고 싶었던 말, 꼭 듣고 싶었던 말을 물어보았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는 ‘잘 해주었다기보다 성격이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어?\"
이 말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 살아가던
내 가난과 무능함에 염증을 느껴 도망친 것에 대한 변명과
능력 갖추고 나도 무언가 해 줄 수 있을 때
이미 너는 타인이 되어 있었다는… 책임전가와 원망 비슷한 것이었다.
대기업이었지만 삽십 몇 만원의 신입사원 급여로
연로한 부모님을 대신해 막내 여동생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맞벌이 하는 것외 방법이 없었노라고
고마운(?) 변명을 해 주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면서..... 믿고 싶었고 우습게도 위로를 받았다.
IMF를 겪으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뛰었던 결과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사회적인 성공도 이루었지만
나이보다 빨리 건강이 나빠졌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돈 없고 빽 없는 대한민국 남자가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경쟁에서 이겨 성공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지,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지금이라도 건강을 챙겨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병증에 대해 안타까워하다가 멈췄다.
나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다.
잠깐의 불편한 침묵이 싫어 또 마셨다.
만나기 전 술을 못한다고 했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 되었다.
그가 만약 싱글이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너 없으면 못 산다\'고 매달리며 3류 영화라도 찍자고 한다면....
갖은 협박과 회유로 꼬드겨 결혼한 남편과
사랑하는 시댁 가족, 가정, 신앙...
내가 가진 그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는가.
없다. 단 한가지도....
생각해보니 그가 행복한 가정 꾸려가고 있음이 고맙다.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날 무렵
정신차리려고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척거림을 감추고 신발을 신으며
오늘은.... 오늘만은 내가 술을 사 줘야지…..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저 손님 좀 부축해 주세요’ 부탁하는 그가
가난하고 능력 없던 지난 날엔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고
능력되는 지금은 그를 관리할 권리가 타인에게 넘어갔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너무 쓸쓸했다.
빌어먹을…
남은 사랑은 없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입술에 가벼운 작별 키스를 한 그가 택시를 잡아 나를 태웠고
그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한 채 와 버렸다.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내 기분에만 취했다는 아쉬움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평생을 같이 살며 같이 늙는다 하더라도
삶에서 어떤 식이든 이별은 오는 것인데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지 못한 채......
누군가는 아픔때문에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했는데
훗날 나도 이 아픔이 값진 시간일 수 있을까.
2월 몇 일, 목이 아파서 수술한다는 그에게
병문안을 가 볼 수도 없고, 수술 후 안부 전화조차 할 수 없는
어쩌면 친구보다 못한 사이인데.....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첫사랑….
부드러운 구름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듯
결코 쥘 수 없는 첫사랑을 만난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END-
추신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되는 첫사랑과의 재회가 미친 짓임은
갖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한 역설일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