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먼저 남자는 남자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여자는 여자가 뭔지를 알고,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남자는 남자가 무엇인지 모르고 남자답게 살지 못할 때 불행해지며, 여자는 여자가 뭔지를 모르고 여자로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단순히 나는 여자이니까 남자가 필요하다, 혹은 나는 남자이니까 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남녀가 같이 살면 처음에는 잠깐 행복한 것 같지만 좀 지나면 공허, 공허, 공허···. 그 남자가 다 그 남자 같고, 그 여자가 다 그 여자 같아서 행복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가 여자를 분명히 모르고 남자가 남자를 분명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음성 에너지가 두 개, 양성 에너지가 한 개 있는 것이 남자입니다. 또 양성 에너지가 두 개, 음성 에너지가 한 개 있는 것이 여자입니다. 남자는 겉으로는 양성이지만 안으로 음성 기운이 둘 있고, 여자는 겉으로는 음성이지만 안으로 양성 기운이 둘 있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의 성리학은 주역을 토대로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여자는 여자, 남자는 남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습니다.
남녀지간에 우정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남녀지간에 우정은 없습니다. 자연은 우정이라는 심리적인 작용도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존재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끝내 가서는 남녀지간의 애정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양성 에너지는 ‘쉽고 친절하다’고 했으므로 처음에는 친구같이 존재할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지나면 안에 있는 음성 에너지가 움직여서 그 여자를 취하려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는 늑대’라고 말합니다. 그 속셈이 나중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만나다 보니까 친해져서 한 번 이불 속에 들어가면 변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조금 전 까지는 “미스 김, 커피 드시겠어요?” 이렇게 친절하다가 이불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어이, 뭐 마실 거 없어? 좀 가져와.” 이렇게 명령형으로 변하는 남자.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까지는 얌전떨고 있다가 이불 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나 뭐 살게 있는데···” 하는 여자. 이런 남자나 여자와는 빨리 헤어지는 게 좋습니다.
또 어떤 남자는 이불 속에 들어가면 만족해 가지고 “미스 김,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만나 주시는 거죠?” 하며 이상야릇한 친절을 계속 베푸는 남자, 이런 남자는 언젠가 여자를 버릴 남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좋아하는 여자, 이런 여자는 소속이 없는 여자입니다. 즉 절개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면 어떤 남녀가 만나야 되는가? 세칭 천생연분이라고 불리는 남녀의 만남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서로간에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런 욕심도 없이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밀착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음양의 기가 완전히 순응되는 상태의 밀착감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가 천생연분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 만나는 것은 극히 힘듭니다. 한 평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거의 만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백년을 사는 동안에 한 번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사람을 못 만날 바에는, 자기 자신이 남자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남자답게 사는 것, 여자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여자답게 사는 것,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자신의 연분을 만나는 것보다 더 쉬운 길입니다.
여성 에너지는 뒤에 남성 에너지를 두 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일단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안에 있는 두 개의 양성에너지가 밖으로 먼저 튀어나와 버리면 자기가 받아들여야 할 그 부분이 쪼개져 나가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여자는 안주할 곳이 전혀 없게 됩니다.
남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바깥으로 나가는 에너지가 있는 한 그 뒤에 안으로 포근히 돌아오는 세계를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직함이 없는 남자, 다시 말하면 벌어야만 되겠다고 사업하는 사람은 망하기 십상입니다. 남자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뒤의 음성 에너지를 통해 얼마만큼 잘 받아들여 안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는가, 또 그것을 어떻게 오랫동안 유지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깊이 있는 남자는 안에 간직할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손자병법에도 “승산이 있는 자가 이긴다.”라고 했습니다. 안에 간직할 세계가 분명히 갖추어진 다음에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추지 않고 ‘안이 비었으므로 내가 움직이면 채워지겠지.’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망합니다. 돈이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얼마만한 시간에 그 돈을 탕진하느냐만 남았을 뿐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남자는 사리판단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일단 음성 에너지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사리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가려고 하는 자가 뭐가 있는가 더듬더듬 생각하는 것이지, 가지려고 하는 자는 더듬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는 가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듬더듬 ‘이것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뭔가 잡히기만 하면 됩니다.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포용력이 확대되어야 성숙할 수 있습니다. 포용력이 있다는 것은 곧 융통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융통성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욕합니다. 회사에서 자기 상관이 온전하지 못하면 자신은 그렇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융통성 없는 사람이 동료들과 허구한 날 술 마시며 상관을 흉봅니다.
남자가 성숙하려면 포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음성 기운의 포용력이 없이 양성 에너지로 꼿꼿이 서려고만 하면 집안이 분산되고 가족이 헤어집니다. 그래서 음성 기운으로 포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포용력은, 세상의 모든 일은 자연이 자연적으로 저지른 일들이기 때문에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랄한 사람도 있고, 자기에게 혹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파렴치한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욕하고 하늘을 욕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가 나서 봄에 피땀 흘려서 농사지어 놓은 것들을 하루아침에 싹 거두어 갔다고 하늘을 욕해봐야 하늘은 꿈쩍도 안 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욕하는 인간이 잘못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세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온전합니다. 다만, 온전한 사람이 드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다 보면 부딪치는 세계가 많습니다. 그것을 모두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사람들이 자신들을 핍박한다고 말할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애증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없애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씨앗은 햇빛도 필요하고 빗줄기도 필요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씨앗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연의 힘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핍박해도 우리는 자연의 힘이 있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싹은 야들야들하게 나왔지만 이제 뻣뻣한 줄기로 굳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