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에서 훈련을 마친 형은 강원도 춘천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지금의 군대처럼 과거에도 어떤 보직을 받느냐에 따라 군생활의 질은 천양지판이었다. 다행히 글씨를 곧 잘 쓰는 재주로 형은 차트병의 보직을 받았다. OHP도 없고 Powerpoint Slide도 없던 과거 군대는 모든 보고를 차트로 하였다. 차트란 전지 크기의 갱지에 보고할 내용을 매직펜으로 적어넣은 것을 말한다. 부대 지휘관의 명령으로 보고 내용을 차트에 깨끗하게 작성하는 병사가 바로 차트병이었다. 따라서 차트병은 사무실 근무의 행정반 소속이었고 몇 안되는 편안한 보직 중의 하나였다. 차트병이 얼마나 편한 보직이었는지 같은 시기에 포천 어딘가에서 포병이었던 큰 형은 휴가 때마다 늘 둘째형의 보직을 부러워했다. 또한 둘째형 역시 셋째와 넷째에게도 이후에 군대에 가면 차트병이 되라고 조언을 자주 하였던 것으로 보아 편안한 보직임에 틀림없었다.
편안 보직을 담당해서인지 형은 제때에 휴가를 나왔다. 그리고 늘 휴가 때는 식구들을 위해작은 선물을 사왔다. 군인 봉급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 형편없었다. 국가에서 배급되는 질 낮은 담배 대신 질 좋은 담배를 사거나, 음주 혹은 간식거리만을 사는 데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흡연을 하지 않고, 음주도 삼가던 형은 쥐꼬리만한 그 군인의 봉급을 모아 휴가를 나올 때면 식구들에게 선물을 사온 것이었다. 춘천의 재래시장에서 양말이며, 스웨터며, 털모자며, 여름 슬리퍼 등을 사서 가방에 담아 이틀을 걸려 춘천에서 집까지 가져오곤 했다. 그래서 휴가를 나온다는 형의 편지는 늘 내게 형이 들고 올 선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형이 자주 휴가를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하였다.
반면 형이 춘천에서 군생활하던 그 시절 집안의 생계는 최악이었다. 큰형 역시 군인으로 집에 없었고, 둘째형의 입대로 유일한 정기적인 봉급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계속 바느질을 하였지만 바느질은 시즌에 따라 들쭐날쭉 하였다. 그래서 바느질이 뜸한 때 어머니는 인근 공사판으로 벽돌을 나르러 다니셨다. 공사판에 가는 날이면 수건 두개로 또아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갔다. 벽돌을 머리에 이고 나르기 위해서 필요하던 나름의 도구였던 것이다. 얼마나 자주 공사장으로 나가셨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바느질이 없던 때에도 자주 집에 어머니가 계셨던 것을 보면 그다지 공사장 일이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그 시절 어린 나에게 집안의 가난을 처절하게 인식시켜주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그것은 매학년 초마다 행해지는 집안의 가전제품 보유 조사,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 그리고 납입금 미납자에 대한 호명이었다.
그 시절 교육을 주관하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제도를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매학년 초가 되면 담임선생님은 학급 학생들을 모두 앉혀놓고 공개된 자리에서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의 소지 여부를 묻곤 하였다. “집에 테레비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전축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집에 선풍기 있는 사람, 집에 믹서기 있는 사람….” 그러한 질문에 단 한 번도 손을 들 수가 없었던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창피하였다. 그래서 매 학년초가 되어 행해지는 집안의 가전 제품 조사시간이 나는 너무나 싫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담임선생님의 가정 방문이었다. 가정방문은 늘 사전에 일정이 잡혀진 스케줄에 의거 이루어졌다. 하루에 3~5명 정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정을 만든 다음에 누구 누구 누구집을 어떤 순서로 방문한다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방문할 집의 학생 모두가 함께 출발하였다. 그래서 만약 우리집이 세번째 방문지라면 처음 두 집을 선생님과 함께 이동하여야 했다. 잘사는 친구집을 본 후에 우리집에 오게 되는 그 순로를 나는 너무나 싫어했다. 우리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집 다음으로 방문해야 할 친구들도 함께 우리집으로 동행하기 때문이었다. 온 식구가 함께 지내는 하나의 방에는 거의 언제나 어머니의 바느질감으로 덮여있어 앉을 자리 조차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 가정방문을 하는 날짜가 다가오면 학교에 가기 싫을 정도였다. 하지만 개근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어머니나 누나에게는 어떤 이유로도 결석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정방문은 거의 예외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개는 바느질을 하다만 어머니와 선생님이 집 앞 현관에서 선채로 길지 않은 시간을 갖고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정방문이 있은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나는 괜한 자격지심에 친구들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우리집을 본 친구들이 다른 애들에게 이미 다 말해버렸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번째로 정말 싫어했던 것 중의 백미는 납입금의 연체였다. 왜 그 당시 선생님들은 그런 방식을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들은 납입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모든 친구들이 있는 교실에서 불러 세우거나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언제까지 납부할 수 있느냐고 묻곤 하였다. 심지어 체벌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땐 ‘지금 당장 집에 가서 갖고 오던지,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부모에게 물어보고 다시 학교로 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단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납부기한이 마감된 이후 납부할 때까지 거의 매일 이루어졌다.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불려 세워지거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나 혼자만 당해야 할 창피였다. 그런데 수업 중간에 집에 가서 갖고 오거나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돌아오라는 때에는 창피에 더 한 고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어 무작정 집에 가서 선생님 말씀처럼 지금 달라고 하거나 언제 줄 수 있느냐고 어머니나 누나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납입금을 납부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극도의 가난을 창피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러한 상황 중에서 훗날인 지금까지 가슴에 멍으로 남아 있는 가난의 창피는 다른 사건에 있었다. 어느 날 학급의 모든 학생들에게 이웃돕기 명목으로 편지 봉투에 쌀을 하나씩 담아 가져오라고 했다. 반장인 나 역시 풍족하지 않은 쌀 독에서 편지봉투 하나 가득 쌀을 담아 등교를 하였다. 그리고 아마 종례시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반 학급의 학생들이 모이자 선생님은 나를 먼저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책가방 속의 내용을 모두 비우고 책가방만 가지고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반장이기 때문에 먼저 나오라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빈 책가방을 들고 나갔더니 그 가방을 벌리고 서 있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른 친구들 한 명씩 나와서 그 책가방에 자신들이 가져온 편지 봉투의 쌀을 붓도록 하였다. 모든 친구들이 다 붓자 선생님은 그 쌀은 내게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그토록 모멸감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까지 오면서 서럽고 창피함에 흐느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소리내어 울면서 형한테 면회가자고 졸랐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형이 있었으면 이런 서럽고 창피하고 억울한 내 사정을 선생님에게 가서 따져줄 것 같았다. 그렇게 형의 빈자리는 내게는 너무나 커다란 혹독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