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그건 나의 일이 아닌 줄만 알았다.
내딸이 하기 전까진.
대학입시가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와서 아무리 귀동냥을 해도
다 이해가 가지 않던 나는 너무 무식해서 용감하게도
표준점수만 믿고 매스컴에서 발표한 배치표에만 의존해서 딸 대신 원서를
써버렸다. 그건 그야말로 써버린 것이다.
앞뒤 재지도 않고 가.나.다군의 대학에 모두 접수번호 1번으로 접수.
눈치작전이란 것도 할 줄 몰랐던 나.
그때까지 딸은 이 엄마의 알량한 정보력(?)을 철썩같이 믿었던지
위험하게도 나에게 그 일을 맡기고 외출했던 것이다.
(그 때 딸은 나의 권유로 영어회화학원 다니느라 바빴다)
물론 그 이전에 전공과 대학이름까지 대강 의논을 하긴 했었다.
학교마다 다른 계산법으로 표준점수를 계산하고, 비중을 두는 과목도
천차만별이란건 우리애가 가.나.다 3군 모두에서 고배를 마시고 나서 알게됐다.
게다가 다군으로 갈수록 가.나군에서 실패를 본 아이들이 몰려 더 경쟁이
치열하고 점수가 높다는 것도 그 때까지 전혀 몰랐다.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난 단순히 전체적인 학교레벨만 생각했던 것이다.
1월이 다 지나고 2월이 오고 또 3월이 되어 신학기가 시작되도록
이제나 저제나 추가합격자 명단에라도 들어있지 않을까 해서
집전화도 핸폰으로 돌려놓고 외출하곤 했는데,
끝끝내 행운의 여신은 우리의 편이 돼주지 않았다.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일찍 단념했으면 덜 슬펐겠다.
추합이란건 왜 만든건지?
더운 여름부터 시작해서 난생 처음으로 100일간 새벽기도를 하러 다닐 때
너무 추워서 정말 꾀가 나 오늘 하루만 빠질까?하는 유혹을 날마다 떨쳐버리고
이가 딱딱 마주치게 추운 새벽을 뚫고 집을 나설 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마침 아들 군대 보내던 날 시작했더니 수능날까지 딱 100일이라
그 우연의 일치가 참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고
우리 애들 둘을 위해 날짜까지 딱딱 맞춰주는구나 흐뭇해하며 인내하던
결코 짧지 않던 시간들.
하나님은 도대체 이러실거면 진작 힌트라도 주시지 어쩜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걸 왜 그냥 두고 보시기만 했을까?
원망이 저절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해맑게 잘 버티던 딸은
3월이 되자 마침내 입을 봉해버렸다. 식구들과 아예 말을 안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악쓰고 덤비면 나을 것같은데 그때부터 수능을 다시 치를 때까지
말을 일절 안하고 살았으니 내가 얼마나 답답해 죽을 것같던지.
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어쩌지도 못 하고 마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사전에 재수는 없다고 나온 점수에 맞춰서 어디라도 갈 거라고 했는데
나때문에 재수생 타이틀을 달게 되었고 또 그 지겨운 고3공부를 다시 반복해야 했으니
저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 기분을 충분히 알 것같기는 했다.
그렇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록 학원도 가기 싫다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공부도 안하고 시간 죽이기에 돌입한 딸을 보는 내마음은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참다 못해 악을 썼다.
차라리 밖에 나가 친구들 만나고 놀러 돌아다니기라도 하라고,
이러다가 너 폐인 된다고.
대학?정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딸이 없어졌다.
가끔 가던 집근처 도서관에 갔겠지 하면서도 왠지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별일 없으려니 하고 출근을 했다.
그런데 저녁에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딸이 안보였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점점 날은 어두워지고
딸을 찾아나선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서관에 딸의 자전거는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딸이 아무데도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다.
아니 얘가 어딜 간거야? 야단맞고 화나서 가출해버렸나?
생전 혼자 어딜 가는 애도 아닌데 대체 어딜 간거야?
도대체 왜 자전거는 도서관에 두고 간거야?
가출할거면 집에 두고 나가지
9시가 지나고 10시가 되어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도
딸의 자전거는 어두컴컴한 도서관 마당에 홀로 우뚝 서있고
딸은 나타날 줄을 몰랐다.
잠시 어디 놀러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자전거를 찾으러 오려니 기다렸던
것도 물거품이 되고 점점 불안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직근무중인 도서관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서관 마당 CCTV를
돌려보곤 불길한 마음은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딸이 거기에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을 멘 채로 도서관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곧바로 정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시각이 새벽 4시45분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같은 표정을 그 직원이 읽었는지
의자를 권해주며 앉으라고 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얼마나 고맙던지.
남편은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전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난 이제 애를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기차역으로 가야하나?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야하나? 도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이른 시간에 잠도 안 자고 어딜 간거야?
밤새 울다가 그냥 나갔나?
목사님댁에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기도부탁을 하는데
엉엉~울음부터 나왔다.
우리애가 새벽에 도서관 CCTV에 찍혔는데 곧바로 없어졌어요. 엉엉~
핸드폰도 두고 나갔어요.엉엉~
평소에 남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내가 그렇게 엉엉 울어본 건
아마 처음일거다.
경찰서에서도 여러번 전화가 와서 간단한 질문을 하곤
사건 사고에 연루된 것같지는 않고-그 당시 흉흉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단순가출 사건인 것같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곧 돌아올 거라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는데 얼마나 얼마나 고맙던지.
내평생 경찰관이 그렇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처음이었다.
남편은 전철역에서, 나는 집에서 어딘가에서 연락이 올까 하고 핸폰을 부여잡고
기다리는데 밤12시가 임박해져가고, 속은 아주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얘가 나쁜맘 먹은 것은 아닐까?
어디 가서 약이라도 먹고?헉.
남편에게 혹시 도서관 뒤 공터도 살펴봤냐고 물어보면서도 얼마나 떨리던지
논두렁 밭두렁까지 다~ 살펴봤는데 없었다고 했다.휴..다행이다.
남편이 아무리 닦달을 해도 나까지 그렇게 딸을 몰아세우진 말걸~
언제까지나 이해해주고 기다릴걸...
공부시키려다가 이거 애 잡은거 아닌가? 그깟 공부가 뭔데 애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아무개가 대학입시 실패를 비관해서 어쩌고 저쩌고...
뉴스 사회면에 나올 일이 순식간에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밤12시 5분전 더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저어~기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낯익은 아이가 있다.
시커먼 점퍼에 노랑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최대한 불쌍한 포즈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디갔다 이제 왔어?엉엉\"
\"도서관 갔다 왔지.엉엉\"
\"어디 도서관? 왜 말도 안하고 가?가면 간다고 하고 가야지이~\"
평소엔 잘 가지 않던 전에 살던 도시의 도서관까지 원정공부를 하러 간 딸
참내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일은 그렇게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에 딸이 아무리 입을 봉하고 말을 안해도 뭐라 훈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애가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도서관 갈 준비를 하는 것같으면
나도 얼른 따라 일어나 말없이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도시락을 싸서 현관에
슬며시 놓아주곤 했다.
책가방 무거울까봐 아주 앙증맞게 작은 보온도시락통도 새로 사고
한 끼는 빵이나 샌드위치,그리고 과일 골고루 싸느라 나름 무진 애를 썼다.
그러면 또 암말없이 도시락은 들고 나갔다가 밤중이면 말없이
터덜터덜 돌아오곤 했다.
한창 꽃다운 나이 스무살을 저렇게 처량맞고 어둡게 보내고
지난 겨울 또 한 번의 수능시험을 보았다.
내딸이 태어나던 해는 60년만에 한 번 온다는 백말띠해였는데
딸들에겐 좋지 않은 띠라고 해서 태아감별을 해 낙태를 많이 했던터라
대입수험생수도 적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훨씬 더 많은 수험생들과 경쟁하게 된 것이다.
그런 사실도 재수한 뒤에야 알았다.ㅠ
하필 난이도가 낮아서 언.수.외 만점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고 했다.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우리애는 한과목도 만점이 없기 때문에 원하던 대학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잘 본 것같은지 딸이 1년 가까이 닫았던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그제야 살 것같았다.
너무 다행스러워서 그 이전 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표준점수로 환산을 해보니 도로 그 전년도와 똑같은 점수. 아뿔싸~
1년 더 고생해서 대체 이게 뭔가?
이번엔 우리 두 내외 머리 싸매고 연구를 했다.
애가 직접 원서를 쓰게 하더라도 좀 더 도움되는 정보를 주고자.
각 대학별 환산점수표를 구해서 따로 계산을 하고 비교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전년도에 얼마나 무식한 짓을 저질렀는지 새록새록 알게 되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셋이서 원서를 쓴 결과
1년 전과 똑같은 점수를 받고도 이번엔 가.나.다군의 대학에 모두 최초합격을 했다.
너무 어이없고 싱거울 지경이었다.
다군에선 전해에 떨어졌던 그 대학 그 학과에 합격하기까지.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총점은 같아도 이번에 다소 어렵게 나와서 변별력이 있다는
외국어과목에서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받아서 대학별 점수계산법으로는
훨씬 더 높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수학에 더 강하고 영어를 싫어했는데 한마디로 운도 따라준 것이다.
대학입시가 이렇게 까다롭고 요지경속이었다니.
담임선생님도 잘 몰라서 부모에게 맡길 지경인 이런 제도가 과연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때 그냥 점수대로 줄세워서 들어가는게 훨씬 더 나았던 것같기도 하다.
1학기 동안은 동아리 활동이다 미팅이다 엠티다 해서 딸의 늦은 귀가와
음주로 인해 줄다리기 하는 시간이었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게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남들을 보며 마냥 부러워만 하던 일들을 드디어 우리도 하게 된 것이다.
그간 맺힌 한을 풀려는지 미친듯이 놀더니 이번 2학기엔 좀 정신차린 것같기도 하다.
대입시가 뭐라고 이렇게 온집안에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