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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인생(3)] 가장 역할...


BY KC 2010-10-30

암에 걸린 둘째 형 위로 형과 세 살 터울인 장남이 있었다. 세 살 많은 장남이 있음에도 둘째형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큰 형의 성격 탓이 컸다. 다른 가난한 집의 큰형들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지만 큰형은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가난만 물려주고 떠난 아버지를 이어 가장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는 심적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자신에게 이양될 수 밖에 없는 전통적 가장 역할에 대한 심한 부담이 형으로 하여금 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아무튼 큰 형은 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진 이후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가게를 얻을 만한 여건이 안되는 상황,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교류하기 힘든 성격은 큰 형으로 하여금 할 수 있는 일을 제한적으로 만들었다. 어렵게 장만한 손수레로 철 따라 다른 품목으로 행상을 하였다. 봄 가을에는 채소를 받아다 전통시장 어귀에서 팔았고, 여름에는 아침 일찍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학교 근처로 나갔고, 겨울에는 당시 모든 가정이 하는 김장에 필요한 생강과 마늘을 다루었다. 하지만 손님을 끄는 일과 조응하기 어려운 성격 탓으로 두 해를 넘기지를 못하고 손수레를 이용한 장사는 접어야 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자전거로 다른 가게들의 물건을 나르던 일이었다. 손님을 찾아 다니지 않아도 되고, 물건 배달이 필요한 가게들의 요구에 자전거로 배달만 하면 되는 일로 형의 성격상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늘 보수가 형편없었고, 현실에 대한 형의 자괴감은 잦은 음주로 이어져 고생에도 불구하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늘 역부족이었다. 그런 미진한 역할이 형의 내성적인 성격에 응고되면서 장남으로서의 권위와 책임에 손을 놔버리고 말았다. 집안의 어떠한 상의에도 참여하지 않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반면 암에 걸린 형의 성격은 큰형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적극적이었고,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형은 아버지의 풍으로 인한 집안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야간공고에 입학을 했다. 현실이 어렵기는 했지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공고를 다니면서 낮에는 시청에서 요즈음 말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생계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아르바이트 자리로 적은 금액이 보상으로 주어졌지만 정기적으로 임금을 받게 된다는 것에 형은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마지막으로 매달려야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의 끈이었으니까.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주위의 공무원들은 형에게 공고를 졸업하면 공무원이 되라고 권유하였다. 그런 권유를 받아서인지 모르겠지만 형은 학교를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였고 공고를 졸업하던 해에 시청 토목계의 정식 공무원이 되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고정적인 수입을 갖게 된 직업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집에서 일곱 자녀의 뒤치닥거리에 가끔씩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돕던 어머니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시집가기 위해 배웠던 한복을 만드는 삯바느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다행히 이남에 내려온 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집안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사주신 일제 재봉틀이 있었다. 위쪽 머리와 발판 그리고 위아래를 잇는 부분은 검은색 쇠로, 나머지 부분은 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재봉틀은 발판을 앞뒤로 구르면 그 동력으로 움직이는 재봉틀이었다. 그 재봉틀을 주된 도구로 삼아 어머니는 우선 동네에 있는 사람들의 일감을 받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동네 사람들의 구전에 구전으로 일감이 들어왔다. 특히 잔칫날이나 회갑연 등을 위한 한복들은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어 이런 일이 들어올 때는 밤낮 없이 일을 해야했다. 한복 천을 가위로 가를 때 그 끝을 붙잡고 있거나, 뜯어낸 잘못 박은 곳의 실밥을 뽑거나, 한복 목 부위에 대는 동정 뒷면에 풀로 얇은 천을 붙이거나, 화롯불에 달구어진 인두를 어머니에게 건네주던 일은 어린 나와 바로 위 형의 몫이었다. 하지만 어린 막내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일했지만 생계에는 늘 부족하였다. 남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한 성품에 높은 가격을 책정하지 못하셨고, 외상으로 옷을 해가고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독촉하지 않으셨다. 다 같이 못사는 시절에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그나마 그렇게 일감을 가져와서 품삯을 지불한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삯바느질은 일의 양에 비해 많은 돈을 벌지 못했고 어머니의 품삯은 생활을 하기에는 늘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기성회비나 납입금 등의 학교에 내는 돈이나 신발값, 학용품값 등 동생들에게 들어가는 비용과 커피포트, 석유곤로, 전기난로 등 생활을 호전시키는데 필요한 물품 구입에 필요한 돈은 형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일정한 수입이 있다는 이유로, 형이나 누나 어머니가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형이 실질적이 가장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동생들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그 기대는 나를 포함한 동생들의 성적으로 옮아갔다. 우리들 성적이 형이 갖는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적표를 가져오는 날은 천당과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천당은 얼마 없었고 대부분은 그야말로 곡소리 나는 날이 되었다. 성적표를 내놓으면 가장 먼저 귀싸대기가 올라왔다. 평소 장난도 잘 치고 다정다감한 모습은 어디 가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가장으로서의 스트레스를 평소에는 누르고 있다가 폭발시키는 것 같았다. 자신의 힘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오는 동생들에게서 보람으로 보상받지 못한 자신 역할에 대한 한계와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대한 좌절이 분노로 화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폭력을 휘둘렀고 가족 그 누구도 그 폭력을 제지하거나 관여할 수가 없었다. 이미 형은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폭력을 동반한 분노는 형의 역할 책임에 따른 자동적인 권한이자 권리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성적표에 찍어야 하는 부모님 확인 도장은 늘 둘째 형의 고유 권한이었고, 어머니나 큰 누나가 할 수 있는 것은 형의 무지막지한 폭력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다음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위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많이 아프지? 것 봐라. 공부 좀 잘하지. 얼마나 형이 속이 상했으면 그랬겠니? 형이 고생하여 뒷바라지 하면 그에 따른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없지 않니? 형이 아버지도 아닌데 너희들 뒷바라지 안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잖니?... 라고 말하면서 형에게 맞은 자리에 우리집 유일한 상비약이자 만병통치약인 안티푸라민을 발라 주시는 것이 성적표 검사 날 어머니나 큰 누나의 몫이었을 따름이었다.

 

곡소리나는 성적표검사 날 둘째 형이 폭력과 더불어 행하는 또하나의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한차례 엄청나게 두들겨 패고나서는 잠시 나갔다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어머니나 누나가 나와 내 바로 위 형을 대충 닦은 후 두들겨 맞은 상처에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외출 옷을 갈아입혔다. 그러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형이 내 바로 윗형과 나를 데리고 시내로 향했다. 어지간한 거리는 모두들 걸어다니던 때로 약 한시간을 걸어 시내의 가장 번화한 곳으로 데려갔다. 가는 내내 형은 별 얘기가 없었고 나는 형으로부터 맞은 상처가 매우 아프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형은 그 번화한 도심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 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가게로 평소에는 언감생심 조차 하지 못하던 곳이었다. 구석 한 쪽에 앉으면 형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가장 화려한 아이스크림을 주문해서 내 윗형과 나에게 사주었다. 정말 맛있지만 먹기가 아까워 조심 조심 두어 숟갈을 뜰 때면 형은 조용한 톤으로 얘기를 시작하였다.

너희들 정신이 있냐? 우리가 아버지가 있냐? 돈이 있냐? 친척이 있냐? 그렇다고 빽이 있냐? 할 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는데 왜 안하느냐? 공부도 못하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냐?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냐?.....

형의 이런 얘기는 맞을 때 아파서 울던 울음과는 다른 울음을 불러 일으켰다. 모처럼 맛보는 그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아깝다는 생각을 덮어 버리는 슬픔이 몰아쳤다. 두들겨 맞을 때와는 더 큰 슬픔이 아이스크림 맛을 앗아갔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때는 형의 그 낮은 목소리의 얘기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