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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야, 니가 가라 군대


BY 자화상 2010-06-01

아들이 논산 훈련소 입소한 지 한 달 만에 전화를 해왔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웃음기를 담아 힘들지 않고 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덩달아 나도 웃으며, 끝까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어디 극기 훈련 갔다가 낼 모레 집에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눈물은커녕 마음도 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상인지 의심이 갑니다.

주워들은 얘기로는 아들이 군대 가서 첫 전화를 해오면 모자간에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가 제한 시간 넘겨서 통화가 끊겼다는데.

저는 마지막 10초까지도 웃으며 태연하게 잘 있으라며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누나야, 니가 가라 군대.”

“뭐라고? 기가 막혀. 엄마 저것이 나한테 군대 가라고 한다니까요.”

“누나가 군대 가면 나는 안가도 되는데.”

“누가 그러든? 한 집에 군대 가는 사람 셋도 있더라.”

“그리고 남자가 군대를 갔다 와야지. 나중에 어디가면 할 얘기가 있지. 내 동기들 중에 군대 못 간 동기가 있는데 야. 남 군대 얘기하면 듣고만 있더라.”

“아~ 그래도 괜찮아. 그냥 누나가 내 대신 가라.”

대화를 들으며 웃어버렸지만 우리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아들이 입영 신청을 해 놓고 휴학한 채 3개월을 집에서 쉬었던 올 겨울 이었습니다.

한창 모자간에 정이 들 시기였던 고교부터 내 곁을 떠나 대학 2년까지 5년을 기숙사 생활을 했던 터라 아들은 입영 전 3개월의 시간들을 금쪽 같이 썼습니다.

 

매일 체력 단련으로 산에 올라갔다 오고 못 읽었던 책들을 사고 빌리고 읽느라 바빴습니다.

그 사이에 내가 해야 할 설거지며 물주고 가꾸는 집안 화분 옮기는 것도 재빠르게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손목이 시려 주무르거나 어깨가 무거워 두드리면 언제 들었는지 달려와 주물러 주었습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아들의 다정다감한 자상함에 자꾸만 감동하였습니다.

 

입영 일을 앞두고, 아들은 집나갈 며느리 항아리에 물 채우고 가듯 세심하게 가족들을 간섭하며 버릇까지도 주의를 주었습니다.

고시 준비하는 누나에겐 나와 잡담은커녕 음식 먹을 때도 책을 들고 보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바깥바람 쏘이고 와서 집중하라고 잔소리하여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다는 누나의 타박을 수차례 들으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설거지를 싫어하시는 아빠께는 앞치마를 입혀드리고, 세제는 적게 물은 중간세기로 놓고 그릇은 제자리에 하며 일일이 일러주어 아빠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아들의 말대로 따라 했습니다.

 

엄마는 책을 읽거나 한자를 쓰라며 부엌일에서 쉬라고 자꾸만 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일주일마다 장보기 할 때면 아들은 따라 나서서 카트를 밀고 무거운 것은 도맡아 들었습니다. 이랬으니 어찌 새록새록 더 정이 들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공부하기 바빠지던 중학 때부터 우린 대화를 잃어갔습니다. 그리고 한참 커 가는 고교시절을 멀리 떼어 놓았습니다. 한 달에 또는 두 달에 한 번 집에 오면 어떤 때는 마치 손님맞이 하는 듯 바쁘다보니 사사로운 얘기 할 틈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나누는 대화의 소재도 공부에 관한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항상 손에 책이 들려 있어서 방해 될까봐 말을 참았습니다. 그리고 대학까지 기숙사로 들어가니 그사이 아들은 자라 안아줄 수도 없게 커 버렸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서먹하기조차 했던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드디어 군대 가기 전 3개월이었지만, 아들을 온 종일 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어렸을 때처럼 세 때 정성을 들여 밥을 차려 주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간식을 챙겨주며 고교시절에 같이 살며 이렇게 먹였으면 키가 훨씬 더 컸을 거라는 아쉬움에 마음이 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친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아들이 저의 무릎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가져다 자기 머리칼을 쓰다듬게 했습니다.

그 때야 깨달았습니다. 아들이 겉모습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라 주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어리광도 피우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내 손길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식을 엄하고 강하게 기르되 따스한 손길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무딘 애정표현을 곡해하지 않고 군대 가기 전에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훈련 받는 6주 동안 매일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랑의 에너지가 샘솟았습니다.

 

1월 어느 날 그 날도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수회 헌혈에 참여하여 피를 뽑아주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을 헌혈 할 수 있을까?”

아들이 보고만 있더니 잠바를 갈아입고 나가기에 운동하러 가는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두어 시간쯤 지나서 들어와 자리에 눕기에 춥나보다 하며 슬쩍 보고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 후쯤에 아들 하는 말이

“헌혈 하고 왔어요.”

하여 깜짝 놀라서 얼굴을 보니 하얘 보였습니다.

“장하네. 갑자기 왜? 헌혈 할 생각을 했어?”

하고 물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해 보고 싶었어요.”

“어디 몸이 이상해지는 곳 있어?”

물었더니 머리가 약간 어지럽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들을 잘 했다고 칭찬 해주고 삼겹살을 구워 먹였습니다.

 

저는 엄마의 자격이 없나봅니다.

눈에 보이는 아들과 아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아직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훈련소에 입소한 지 한 달 만에 전화를 해온 아들의 힘들지 않고 잘 있다는 말만 듣고 안심을 하며 웃었습니다. 정말 아주 편하게 잘 있는 줄 알고 말입니다.

설마 아들이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과 집 떠나 군대를 가 있는 설움을 숨기면서 웃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말했습니다. 지금이 제일 힘든 때 일거라고 말입니다.

 

엄마가 군대를 너무 모릅니다. 아들이 어디 여행을 간 듯 그저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태평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들이 없는 세상은 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 할 정도로 아들을 사랑합니다.

아들이 농담으로 누나에게 자기 대신 군대 가라고 할 때에 저는 마음으로 딸에게 정말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은 남아다운 기백이 보이는 성격이며 아들은 온순한 성격이라 둘이 바꾸어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나와 떨어져 사는 동안 아들은 내 걱정과는 다르게 듬직한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돌을 머리로 밀어 젖히고 허리 펴고 올라오는 화분의 감나무 새싹처럼 말입니다.

 

입영 날 환영식 내내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백 명의 아들들에게 부모의 품을 떠나 운동장으로 집결하라는 방송이 나오자 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본 아들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린 참았던 눈물을 닦으며 손을 놓았고 순식간에 섞여져 누가 우리 아들인지 찾아 내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건강하고 모든 훈련 잘 받고 수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돌아왔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었습니다. 전화를 해 온 아들은 평소와 똑 같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습니다. 역시 믿음을 주는 아들이었습니다.

누나에게 대신 군대 가라 했던 아들이었지만, 이젠 훈련병 아닌 의젓한 군인이 될 아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습니다.

“근호야 엄마는 너를 많이많이 사랑한다.”

 

201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