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망설인다.
이름을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신호가 간다. 나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받을 확률은 거의 20%미만이다.
받지 않을거란 생각에 문자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언제나처럼 잘지내고 있느냐에 질문에 그녀는 잘지내고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때는 힘이 하나도 없고 어떤 때에는 평온하고 또 어떤 때에는 밝고 쾌활한 목소리다. 내가 가장 반가울 때는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이다.
언젠가 홍대 근처에 런치메뉴가 저렴한 뷔페집 가서 밥이나 먹자 했었는데 그녀가 너무 힘들때 통화를 해서인지 내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팡팡 놀고 있다 했는데도 전혀 그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어머 그랬니? 난 네가 뷔페집 가자고 한 말만 기억나서 오늘쯤 전화나 해볼까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결코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다.
사실은 오늘도 난 망설였다.
나 너에게 전화해도 되는 걸까
친구의 어머니는 지금 암투병중이시다. 경기도 포천에 요양중이신데 치료의 단계는 끝났고이제는 차분히 마음만을 다스리고 있는 상태라고 하신다. 기어코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는데도 친구는 한사코 말렸다.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가더라도 하룻밤 자고 와야한다면서 아이들까지 봐야하는 내가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마음만이라도 고맙다고...
나의 친정엄마가 부산에서 폐농양을 암으로 오진해서 수술하겠다고 달려드는 의사로부터
거의 탈출하다시피하여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와 계실 때만 해도 친구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건강하셨다. 우리 엄마보다도 더 젊어보였고 생기가 넘치셨다.
그런 어머니가 우리 엄마가 아프다고 하니까 꼬리곰탕을 친구의 손에 들려서 보내주셨다.
세브란스병원은 너무 넓어서 정문에서 흉부외과 병동까지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라와야 한다. 친구는 무거운 꼬리곰탕을 들고 그곳까지 힘들게 올라왔다.
그때의 친구와 그 어머니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랬던 어머니가 지금은 사람도 못알아볼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 하는데
나는 맛난 음식도 해드릴 수도 없고 찾아뵙지도 못하고 있다.
친구는 서울에 처음 왔을 때 회사에서 만났다.
어떻게 마음이 맞았는지 장흥 아트갤러리를 가보고 싶다는 내 말에 선뜻 가자고 나섰고 함께 덜컹거리는 비둘기호를 타고 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난 친구에게 어떻게 내 마음을 그대로 다 보여줄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놀랍기 그지 없지만 그때부터 우린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내가 자취방에서 오후 3시까지 잠을 자고 있을때 불쑥 찾아와서 밥도 안먹고 자고 있던 나를 보며 가을낙엽이 멋있다며 놀러가자고 했다.
미역국을 끓여주겠다면서 미역을 들고와서 볶다가 막상 잘 안되서 해매던 그녀는, 태어나서 한번도 끓여본적 없는 미역국을 내가 조미료 넣고 볶아서 끓여내자 감탄사를 연발했었다. 우와...밖에서 파는 3분 미역국이란 맛이 똑같애!!
TV 없이 주말을 책(만화)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 그녀와 함께 만화방에 들렀을 때 내게 건네던 만화가게 총각의 눈빛이 너무 느끼하다면 “느끼 1호”의 별명을 붙여주었고
그 다음의 과일을 사러 갔을때 과일가게 아저씨의 과도한 친절이 너무 느끼하다며 “느끼 2호”의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렇게 집에 오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그녀의 집에 놀러갔던 어떤 날은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었다.
객지 생활에서 마치 친정엄마가 갑자기 해 준 밥상을 보는 것같아 가슴이 울컥 했었다,
우리가 단둘이 갔던 여행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속초,설악산에서 만났던 국군장병 아저씨들, 민간인 신분으로 처음 먹어본 군 내무반에서 먹었던 식판의 짠밥, 졸병군인이 들고 왔던 향긋한 다방커피, 그리고 평생 잊을수 없는 일출...
부여에서의 특이한 경험, 외국인 교환학생과의 첫만남과 추억...
그리고 가장 최근의 수덕사 여행까지...우린 그렇게 함께 여행을 많이 다녔고 그녀와 함께한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녀 역시 이상하게도 나와 함께 여행을 가면 꼭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면서 즐거워했다. 여행이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랑 같이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친구였다.
내가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너는 그림을 좋아하니까 분명 이번 여행이 좋은 경험이 될거야” 라고 말했주었다. 난 그냥 여행이 좋아서 들뜬 것이었고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친구의 말 때문에 난 여행에 대한 각오를 남다르게 가지게되었다.
공교롭게도 결혼도 같은 해에 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해 오월의 신부가 되었고 난 가을의 신부가 되었다.
결혼을 몇달 앞두고 심한 스트레스에 몸무게가 줄었고 생리때가 아닌데도 심한 출혈이 보름간 지속이 되었다. 병원에 갔더니 스트레스성 호르몬 이상 출혈이라고 한다.
늦은 나이의 결혼도 걱정스러운데 결혼도 하기 전에 이렇게 약한 자궁으로 임신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 때문에 결혼을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싶을정도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있을 때였다.
그때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젊은 나이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잖아. 늦은 나이의 결혼이기에 아이를 바라는 건 하나의 축복이고 선물일거야. 설령 생기지 않는다 해도 아이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우리는 우리만의 인생을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어.“
나는 결혼을 했고 결혼한 지 한달만에 아이를 임신했다. 그것도 쌍둥이를....
그런데 그것이 본의아니게 그녀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화를 걸어 집에 놀러오라고 했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했고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때는 멋진 이벤트로 가족들과 함께 보낼거라 말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늘 전화를 걸면서도 왜 이 친구는 먼저 전화를 하지 않을까 서운해 했다. 힘든 상황임을 알기에 그래서 내가 먼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이 친구는 더 이상 나를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든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하는데 왜 친구는 늘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이렇게 전화해도 되는 걸까?
그래서 어떤 때는 보고 싶어도 일부로 참고 있다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지못할 때 쯤이면 내가 답답해서 전화를 하게 된다
하지만....정말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이 친구가 원하는 것을 해 줄거라는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다.
그러면 너무 슬프겠지..내 추억속에서 언제나 활짝 웃고 있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인데...친구를 지음(知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는 친구의 마음만을 추측만 할 뿐 알아주지 못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녀의 친구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지금은 못 입게된 임부복을 옷장 상자속에 고이 모셔두고 언젠가 그녀가 필요하면 언제든 주겠다고, 제발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그녀를 위해 어떤 말도 해주지 못하는 내가 바보스럽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그녀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우리만의 인생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한들 그녀에게 나의 진심이 전달이나 될까?
그저 함께 한 점심을 먹은 뒤 그녀가 지갑을 꺼내들기 전에 먼저 가서 계산을 해야 한다는것과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집에 데려와서 제주도에서 보내주신 ‘옥돔“을 챙겨주고 주말농장에서 뜯어온 상추와 열무를 싸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언젠가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먼저 전화를 해주는 그런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Vashti Bunyan \'Lookaftering\'
: 저도 모르게 포크뮤직의 전설이 된 여자가 다시 기타를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음반. 맵지도 짜지도 쓰지도 달지도 않은 시원하고 맑은 물 같은 노래들이 가득하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그 사이 녹색잎에 있었던 일들은 내게도 있었다. 나도 그 모든 것을 겪었다\"고. 그리하여 다시금 확인한다. 이 생을 어떤 일이 있어도 \'나자신\'으로 살아내는 것이 망가지지도 화려해지지도 않으면서 행복해지는 길임을...
카라 : 어느날 문득 잃어버린 \'나자신\'을 발견할 때면 쓸쓸해진다. 나 자신으로 살아내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우린 수시로 그것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을 일깨워주는 건 나에 대해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소중한 옛 친구이다. 그들은 때때로 망가져가는 나를 일으켜 세우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