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박 정 애
“호야 못 봤는교?”
‘호야’는 할머니께서 나의 삼촌을 가리켜 부른 이름이다. 본명은 박 영호, 열아홉 살 나이에 6.25 전쟁이 터지자 자진 입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아들의 전사 통지를 받고 나서 어느 해부턴가 치매기를 보이기 시작한 할머니께서는 지나가는 군인을 보게 되면 열에 열 번 “호야가?”라고 하셨고, 사람을 만나면 일일이 “우리 호야 못 봤는교?”라고 하시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목을 놓고 찾으셨다.
5남매를 두셨던 할머니는 홍진으로 연달아 딸 셋을 잃고, 남은 아들 형제 또한 잘못될까봐 안고 업고 살얼음판 건너가듯 키워냈다 하셨다. 그러한 작은아들이 전쟁이 터지자마자 갓 소년티를 벗은 또래들끼리 의논하여 영장도 받지 않은 채 입대한 그날을 마지막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조부모님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삼촌을 찾으셨고, 그러한 동생은 내 아버지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남으셨다. 입대하는 날 가족이 말렸다고 한다. 영장이 나올 때까지라도 기다려보자고 온 가족이 말렸지만,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경험한 삼촌은 극구 뿌리치고 입대하였다.
삼촌의 생사를 알 턱이 없는 여섯 살짜리 소녀인 나는 전쟁이 터진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외딴 과수원집, 평소 친구한테 놀러 가려면 한참 동떨어진 동네로 가야 했다. 어린 나는 동네까지 놀러 가기가 너무 어려워 오빠, 동생하고만 놀았다. 혹 누군가가 찾아오면 자지러지도록 반가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사랑채, 도장, 마구 채, 심지어 대청마루 밑에까지 사람들이 살 아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집 안 구석구석 어른과 아이들로 넘쳐 났다.
평소 늘 심심했던 나는 또래의 오빠, 언니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게 무조건 좋았다. 우리 집 과일나무는 임자가 없었다. 감, 자두, 살구 갖가지 과일을 수북하게 따서 언니 오빠들은 주인집 딸인 나와 항상 같이 놀아주었다. 어디 놀러 가도 꼭 나를 데리고 갔기에 나는 신이 나 있었다.
언니 오빠들과 강가에 나가보니 강변에는 돌로 얼기설기 담을 쳐 놓고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모두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일찍 피난 온 사람들은 그래도 동네의 집 안에서 살 수 있었지만, 늦게 온 사람들은 강변이나 언덕 밑에 움막을 지어 살았던 것이다. 어린 나는 사람들이 들끓는 것이 좋았다. 그때의 과수원집 딸인 나는 인기 만점이었다. 어려운 시절, 과일 몇 개만 들고 나가면 서로 자기편이 되기를 원했다. 어느 편으로 가느냐 하는 선택권은 언제나 나에게 있었기에 나는 늘 으스댈 수 있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 모두 보따리를 사 들고 떠날 때 나는 이별의 슬픔이 서러워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모두가 빠져나간 동네와 강변에는 또다시 한적한 시골동네로 변했다. 피난민이 살고 간 돌무더기 집이 아이들 소꿉놀이와 전쟁놀이터가 되었다.
삼촌이 떠난 어느 날부턴가 할머니께서는 아침마다 세수를 정갈하게 하시고 머리를 곱게 빗은 다음 가장 큰 장독대에 하얀 대접에 물을 떠놓고 동쪽 해를 향해 두 손 모아 비셨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천지신명에게 비시는 것이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해가 뜨는 날이면 하늘을 향해 매일 비는 모습이 창피했다. 아침에 소를 먹이러 뒷산에 가려면 우리 집을 지나가는 소몰이 아이들은 할머니가 비는 모습을 보고는 “너거 할매는 와 만날 빌어 샀노? 할머니 흉을 내는 아이들이 미웠다. 내가 싫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할머니의 정성은 그렇게 빌다가 우리 가족이 천주교로 개종 후 아버지께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교리 책을 할머니께 드려 그 뒤로는 늘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삼촌과 한 부대에 있었다는 경북 군위에 사는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다. 한걸음에 달려가신 아버지는 실망하셨다. 북진 후 이북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말과 자기는 나물인 줄 알고 뜯어 먹은 풀이, 독초라서 죽은 줄 알았는데 며칠 후 깨어나서 죽음을 무릅쓰고 내려왔다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부모님께 말씀 못 드린 아버지께서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자식에 대하여 한 말씀도 안 하시던 할아버지와 오매불망 못 잊어 하시던 두 가슴에는 가시는 날까지 전쟁의 상처를 삼켜야 하셨다. 할머니가 가시는 날까지 지금처럼 매달 나오는 게 아니라 60년 초반부터 일 년에 두 번씩 연금이 나왔다. 아홉 명이 입대해 한 사람만 살아서 돌아오고 모두 행방불명이 된 전사자의 부모들은 연금을 타러 함께 갔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시며 가셨다. “죽은 효자 연금을 받아오는 날이다.” 할머니의 푸념이셨다. 어려운 시절 연금이 가용에 유용하게 쓰였지만, 할머니는 아들의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밤을 지새우셨는지 잠결에 깨어 할머니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할머니의 치매의 증상이 있었다고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지만, 초기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때가 할머님은 60대라고 기억이 된다.
사주에 종신자식이 없다던 할머니는 51세의 짧은 생을 마치신 아버지보다 석 달 뒤 70년
음력 3월 그믐 81세로 돌아가셨다. 굴건제복을 한 손자를 향해 저 인물 좋은 젊은이는 부모상을 당했나요? 단 한 점의 혈육이 세상을 하직한 것을 할머니께서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서인지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를 초점 잃은 눈으로 쳐다만 보고 계셨어 문상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자리서도 방금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열아홉 살에 전쟁터에 간 작은아들 본 사람을 찾으셨다. 자신은 행복하고 같이 사는 사람은 괴롭다는 치매 환자인 할머니의 기억은 그 옛날 아들의 전사 통지서 받던 시절에서 머물고 계셨다.
할머니보다 6년 먼저 가신 할아버지께서는 말수가 적으셨다. 할머니가 비는 모습도 말리지 않으셨거니와 권하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한을 안으신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져서 천식까지 앓고 계셨다. 숨결이 가빠 편안히 누워계시질 못해 가시는 날 아버지께 안기 신체 돌아가셨다. 동생이 오면 아버지의 유언이 무어라고 전할까요? 라는 아버지 질문에 살았다는 희망을 잃은 지 오래다. 천만다행으로 살았다면 너희가 잘할 거니 할 말이 없다는 어눌하게 들려주신 마지막 말씀이셨다고 한다. 72세에 가신 할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한 듯 눈을 감으셨다.
내 나이 66세다 가족 중 삼촌을 기억하고 6.25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동생은 49년 생이라 6.25를 기억 못한다. 하느님은 우리 가족에게 수명을 주지 않으셨다. 5살 위인 오빠도 24년 전 48세에 일기로 저세상으로 갔다. 엄마가 가신 아홉 달 후 일이다. 내 머릿속에는 자손이 귀하고 단명인 친정댁이기에 삼촌의 존재를 잊지 못한다. 연금은 받았지만 그래도 북쪽 하늘 아래 어디엔가 살아 계실 것만 같은 삼촌을 내 생전에 통일되어 생사를 확실히 알고 싶다.
얼마 전 하나원에서 탈북자에게 남한가정을 체험하는 교육을 의뢰해 왔다면서 성당에서 한 사람씩 1박2일 체험시키고 싶은 가정을 찾았다. 내가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교육을 받은 며칠 후 교육장에서 나는 내 명찰을 달고 내 번호와 맞는 탈북자 새터민을 맞이했다. 나와 같은 성씨기를 간절히 원했다. 천만분의 일이라도 삼촌의 딸이거나 손녀이기를 바라면서 아버지, 할아버지 존함이 무어냐고 묻고 기적이 나타나기를 하느님께 빌었다. 아쉽게도 다른 성씨였지만 아직도 포로들이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과 누구도 원치 않는 남북이 갈라져 힘들게 살아온 북의 생활과 죽음을 무릅쓰고 이 땅을 밟은 딸 같은 젊은이와 함께한 1박2일은 내 삼촌이 겪은 삶을 듣고 있듯이 눈물이 났다. 엄마라고 하고 싶다는 딸아이에게 엄마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남매를 데리고 탈북했다고 하니 공짜로 손자 손녀까지 생겼다. 꼭 껴안아 주고픈 내 가족들이다.
어느 해 친정에서 족보를 간행한다기에 한 질을 샀다. 족보에는 나라를 위해 던진 몸인 삼촌이 족보에도 얹혀 있질 않았다. 외손인 내 아이까지도 얹혀 있으면서 말이다. 30년 만에 간행하는 족보라 족보를 만들 당시 전사 통지서를 받아서 그런지 혹시나 싶어서 다시 찾았지만, 무명의 용사는 족보에도 세상에 난 흔적을 남겨두지 않았다.
족보에도 못 얹힌 나라의 아들! 그 아들들 덕으로 우리는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당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나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신
시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 성모 국방부장관 아들이 유일하게 전사당했다는 글이었다. 지식인이 넘치는 요즈음 세상, 나라의 위기가 닥쳐오면 누구의 부름도 없이 삼촌처럼 달려갈 용사가 몇이나 될까?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아들이 특공대 유사시 간첩이라는 게릴라부대 배속을 받고 나는 밤을 지새웠다. 자식을 키워본 나는 할머니에 까맣게 탄 가슴이 치매가 되었음을 나는 알 것 같다. 저 세상에 계시는 그리운 내 가족들 삼촌을 만나셨는지 아니면 이북 어느 곳에서 아직도 살아 계시는지 그곳에서도 할머니는 우리 호야를 찾으시는지 이 글을 쓰는 순간 지난 세월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