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메눌아 ……이거….”
일찍 부모님 여의고 혈혈단신 월남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 외 삶의 방도가 없었던 엄니. 여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한국 떠나던 날 아침 모서리에 종이 꽃이 보슬보슬 핀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아들이 더 잘 되려고 간다는 말에 차마 잡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빈손으로 보내는 것이 더 가슴 아픈 엄니의 그 마음을 왜 모를까.
2년치 등록금을 선납했고 내가 회사 출근이 결정되었다고 말씀드려도
아들과 헤어짐이 슬프고, 여비 쥐어 보낼 능력 없는 게 서러우신 엄니는
이래 저래 눈물 바람이시더니 무언가 준비하셨던가 보다.
“엄니! 비행기에서 먹으라고 살구씨 아네요? 살구씨 많이 먹으면 설사 하는데 흐흐 ”
“거~ 살구씨는 꼭 보신탕 먹고 먹어야 하는 고야~ 아니 그르믄 위장 깨껴(깎여)”
그랬었다. 방학이면 보따리 싸 들고 시댁으로 달려 가
방학 끝나는 날까지 평일 무전취식, 주말 외식담당 걸(Girl)을 자청하며
바퀴벌레만 봐도 숨을 헐떡이는 형님과 개고기라면 기겁하는 남편 이하 온 식구들의 지탄을 받으며, 툭하면 엄니 앞장세워 보신탕집을 단골로 드나들었다.
엄니와 둘이 향긋한 깻잎에 잘 익은 쫄깃한 고깃살을 들깨장 찍어 주거니 받거니 먹고 나오면, 군대 동기 같은 끈끈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리고 돌아와 나란히 누워 살구씨 오도독 오도독 씹어 먹으며
군산 피난 시절부터 시작되는 엄니 인생 리얼 스토리를 황해도 사투리로 두어시간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엄니는 가만가만 이불 덮어 주시고 볼륨 죽인 텔레비전을 보셨다.
날이 날인만큼, 오버액션하며 엄니가 주신 봉투 퀴퉁이를 찔끔 열었다. 안에는 아주 오랜시간 모았을 엄니의 전재산과 언젠가 우리가 생신 선물로 해 드렸던 순금 쌍가락지가 들어 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가 …. 돈 필요하대….. 엄니나 반찬 가리지 말고 … 혼자라도 자주 보신탕 집 가서 드시고………… 건강하게만 계시면… 우린 금방 올 거야..... … .”
그렇게 울며 불며 떠나 온 것이 벌써 일곱 해가 지났다. 그 사이 두 번 한국을 다녀왔지만 나 혼자 출장가서 잠깐, 남편 출장 길에 따라가서 또 하룻밤이 전부였다.
아브라함의 나이만큼 엄니가 오래 살아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은 나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직 이별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나는......
한 밤중에 잘못 걸려 온 전화 벨 소리에도 혹시 하는 마음에 가슴이 쿵 떨어진다.
엄니! 싸랑해요……
엄니 쌍가락지에 얽힌 글이 홈피에 있어 함께 올려 본다.
제목: 짜잔~ 엄니 생신 선물 ^^
우리 시댁이 있는 춘천시 온의동은, 호박 밭이 집들보다 넓게 펼쳐진 구석진 동네지만 행정구역으로는 분명 춘천시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대학원 계절학기를 다니는 한 달 동안 우리의 무대를 춘천으로 옮긴다.
시댁 가는 길은 언제나 발걸음도 가볍다. 매콤한 양념 닭발 한 솥 해 두셨을 엄니와 바나나 우유 사놓고 기다리실 형님.... 생각만 해도 신난다. 히~
속 옷, 귤 한 박스, 쥐포, 찬밥, 볶은 김치, 냉동실 옥수수, 우족. …...
냉장고를 홀랑 뒤집어 큰 소쿠리에 채곡 채곡 넣고, 잉꼬새 부부도 데리고
식구들이 저녁을 먹고 난 뒤 우리 밥상을 얌전히 차려 놓았다. 요즘 식탁이 대세지만 수시로 형제들이 모이는 우리 시댁은, 옛날 둥근 양은 밥상을 사용한다.
\"야아~ ~ 쪼끔 뜨는 척 하면서 빨랑 많이 퍼 와~~\"
밥통 뚜껑을 여는데 남편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
왜?\"\"형수님 보시면 너 밥 많이 먹는다고 쫓겨난다.\"
ㅋㅋㅋㅋ
시댁만 가면 진짜 밥을 많이 먹긴 한다. 밥만 축낸 뒤 밤 늦도록 장난질에 인터넷만 해대다가 엄니 방문을 빼꼼 열었다. 성경책을 읽고 계셨다.
위가 약한 엄니는 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파도 어지간하면 진통제를 드시지 않고, 그렇게 밤을 새우는 데는 이력이 났으니 걱정 말라고 하신다. 자식이라고 대신 할 수 있는 아픔도 아니고 못내 마음이 쓰여 시무룩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았더니 남편이 모종의 제안을 한다.
\"야~ 너 금반지~ 오늘 밤에 엄마 빨랑 드리고 와~\"
\"안돼! 이건 엄니 생신날 짜잔~ ~~ 하며 드릴 건데.....\"
\"기분 좋아지면 엄마 다리가 오늘밤 덜 아플지 모르잖아..\"
\"안대!! …...\"
\"그럼.... 그럼 말이야..... 한 개는 오늘밤에 드리고 한 개는 생신 날 짜잔~ 하면 안될까?\"
초딩처럼 어째 그런 발상을???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다. 쌍가락지니까 오늘 한 개 드리고 생신 날 한 개 드리자는 아이디어다. 짜잔~ 에 목매던 내 마음을 접고 드리기로 했다.
엄니의 작고 쪼글쪼글한 손가락엔 십 수년 전 아버님이 해드린 작은 알 반지 하나가 손바닥 쪽이 닳고 닳아 엄니의 살붙이가 된 듯 꼭 끼워져 있다.
“엄니…… 이거…. 생신 축하 선물 히~”
\"아이쿠~ 이건 왜 샀냐.... 요새 금값도 비싼디…. 니들 담에 돈 벌믄 사주지….. 이담에…\"
한 밤중에 느닷없이 쌍가락지를 받아 든 엄니가 무조건 왜 샀냐고 펄쩍 뛰신다.
부모 마음이 이렇다. 자식에게 받는 선물이 무엇인들 반갑지 않으랴만, 자식 사정 헤아리느라 반가움보다 걱정을 앞세운다.
엄니는 바보.... 그 마음 자식이 눈꼽만큼만 헤아려 주면 다행일텐데...
\"엄니~ 이담 이담에 ...... 우리 돈 많아도 엄니 손 없으면 어떻게 껴 드려? 이렇게 건강한손가락 빌려주시니 고맙기만 하구만…...\"
금은방에서 그랬다. 요새 금값이 그야말로 금값이라고.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어 신용카드 거래는 안되고 반드시 현금 거래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금붙이 사 본 일 없는 남편은 혹시 금값이 내릴 지도 모르니까 좀 기다렸다가 사 드리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럼 금값 쌀 땐 왜 안 해드렸어?
지금 못 하는 일은 나중에 하긴 더 어렵다.
지 새끼 키우기에 더 바쁘고 ... 아이들 크면,.... 집 사야지… 집 사면 살림 늘이고 싶고 ...... 살림 채우면 신제품으로 바꾸고 싶어지는 게 사람 살아가는 모양새다.
이유는 늘 생기기 마련,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마음이 시킬 때 하는 것이 그 ‘때’인 것을. 특히 부모님께는 순간을 놓치고 평생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돈이든 물건이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