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pain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거의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겪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통에는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주적 조화에서 벗어나 있다는 경고입니다. 생명(사랑)에서, 중용에서, 현실에서 벗어나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능 중에 자기 보존의 본능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화와 균형으로 항상 최상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주가 영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주 안의 모든 존재들에도 해당됩니다.
우주는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조화와 균형에서 벗어날 때는 곧 어떤 작용을 일으켜 불균형을 바로 잡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차가운 물이 들어 있는 컵에다 뜨거운 물을 넣으면 조금 있으면 미지근한 물이 됩니다. 곧 평형을 이룹니다.
사막의 모래 위에 구덩이를 하나 파놓으면 다음날 가서 보면 구덩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의 모래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구덩이는 불균형이니까요.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바위, 그것은 아직 전체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균형이 깨지면 그 바위는 굴러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안정을 되찾습니다.
지진이라는 것도 지구 자체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균형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봤을 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생활적 고통 등이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 고통을 봅시다. 발에 못이 박히면 몹시 아픕니다. 우리는 아프기 때문에 못이 박힌 것을 깨닫고 그것을 빼냅니다. 그러나 만약 아프지 않다면 깨닫지도 못할 것이고, 못이 박힌 채로 걸어 다닐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발이 썩어 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한 경고인 셈입니다. 질병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의 생활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조화와 균형을 깨뜨린 원인을 빨리 찾아서 해결하라는 경고인 셈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자신을 보존할 수 없게 됩니다.
우주의 자기 보존의 본능이 주는 경고를 무시하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도 결국은 안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정신적 고통을 봅시다. 여러분이 1억을 빌려서 주식을 하다가 주식이 갑자기 폭락해서 휴지 값이 되어 버리면 여러분의 마음은 무진장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 고통은 바로 여러분이 돈에 집착하여 마음의 조화와 중용을 잃어버렸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사이에 고통이 있다면 여러분이 연인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울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생활적인 고통을 봅시다. 여러분이 만약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인간관계에 부조화가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무리하게 돈을 빌려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다보면 머지않아 은행이나 채권자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그 고통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것도 또한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금전적인 면에서의 균형과 조화를 되찾으라는 경고입니다.
또 여러분이 불성실하여 비참할 정도로 가난함을 겪고 있다면, 그것도 여러분의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에 있어서 고통이라는 것은 우주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칼릴 지브란도 <예언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 고통의 대부분은 스스로 택한 것.
그것은 그대들 내부의 의사가 병든 자아를 치료하는 쓰디쓴 한 잔의 약이기에.
그러므로 의사를 믿어라.
그리고 말없이 침착하게 그가 내주는 약을 마시라.
그 손은 무겁고 거칠지라도 보이지 않는 이의 부드러운 손길에 인도되고 있으므로.
그리고 그가 내주는 잔 또한 그대들의 입술을 불타게 할지라도
도공이 자기의 신성한 눈물로 적신 진흙으로 빚은 것이기에.”
결국 고통이라는 것은 매우 고마운 것입니다. 때문에 고통이 나타나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고통을 준 상대가 사람이든 질병이든 물건이든, 그에게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잘못을 깨우쳐 주거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자아, 에고)’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특히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은 여러 가지 시련을 주어 그를 단련시켜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삼습니다.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시련이 다가올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무의식)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을 도와주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관계하지 않습니다. 병을 염려하면 병을 줍니다.
아무튼 시련이 닥쳐온다는 것은 바로 생명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여러분의 소원에 응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을 ‘신의 은총’이니, ‘신의 사랑’이니 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시련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집착을 제거하고 ‘생명’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나’라는 것은 그 자체가 가지는 인력(욕망)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고통을 관조하여 그 원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무런 고통이 없는 집착 없는 사랑, 즉 생명(사랑)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자연은 진화가 목적입니다. 진화의 끝은 곧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 자연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작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우리 인간은 끝없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 사랑을 터득하기를 자연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자연의 본질인 생명(사랑)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우주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윤회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빨리 ‘나’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 속에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의 꼴을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의 껍질을 벗기기가 어렵습니다. 고통의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감자의 껍질을 쉽게 벗기려면 큰 대야 안에 많은 감자를 집어넣고 서로 막 비벼대면 됩니다. 이 세상은 큰 대야이고, 우리 각자는 대야 안의 감자인 셈입니다. 이 우주는, 우리가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자신 속의 ‘나’의 껍질을 스스로 벗겨서 더 이상 고통이 없는 태초의 생명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 우주의 근본인 ‘생명(사랑)’은 그 자체의 법칙을 갖고 있으며, 거기에 합당하면 복을 주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고통을 줍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키워주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생명을 해치고 괴롭히고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줍니다. 이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요, 신의 법칙이요, 생명의 법칙입니다.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