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문밖엔 12월을 시작하는 바람이 분다.
그 약삭빠른 바람은 힘없는 환자들에게 달라붙어 따스한 대기실로 들어와서는
몸을 녹이다 아예 잠들어버린다.
이곳의 바람은 북쪽의 일산바람보다 3배 이상 속도가 빠르다보니
차갑기가 얼음을 얼굴에 대고 뛰어가는 것 같다.
내가 일하는 별관에서 본관으로 샘플(환자에게서 뽑은 혈액)을 임상병리과로 배달을 하려면
병원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백 미터 달리기를 하듯 뛰어가게 된다.
원래 겨울을 싫어했지만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더욱 더 겨울이 꼴도 보기 싫다.
본관에서 별관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너무 불편하고 춥다고 항의를 했지만
허허벌판이라 바람이 머물 곳이 없어 그런걸 어쩌겠는가?
우리끼리 모여 지하도를 뚫던지 지상으로 통로를 만들던지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의견을 주고받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벚꽃이 하얗게 나비처럼 날리더니 어느덧 눈이 꽃이 되어 날린다.
처음엔 앉을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서 환자가 누웠다 가는 빈 침대에 걸터앉다가
구석진 창문아래 청록색 의자를 갖다 놓고 창 아래 햇볕이 다정하게 내려오면
다리를 꼬고(난 앉을 때 다리를 꼬아야 편하다) 책을 한두 장씩 볼 여유가 생겼다.
햇볕처럼 다정한 원장님은 일 틈틈이 책을 볼 때 행복하지요? 하고 묻는다.
책을 본다고 눈치주지 않아 참 좋다.
간호사들 중에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의자에 앉아 있으면 환자들은 내가 수간호사인줄 알고
시술에 대한 질문이나 아픈 것에 대한 하소연을 하신다.
어느 날은 나이든 환자분이 주방아줌마? 하고 불렀다.
난 누구를 부르는 거지하고 두리번거렸더니 나를 쳐다보면서 춥다고 이불을 덮어 달라고 하신다.
수간호사로 보든 주방아줌마로 보든 이곳을 다니면서 일한 대가로
우리 세 식구가(강아지까지 합하면 네 식구) 먹고 살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하게 여긴다.
일산에서 병원으로 출퇴근하는 버스는 이삼십 분마다 한 대씩 온다.
다른 계절엔 그러려니 하고 느긋하게 기다리지만
겨울엔 나도 모르게 이놈의 지겨운 버스, 혼잣말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내복을 입고 내복위에 긴 양말을 신고 거기다가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털장갑을 끼고
전방을 지키는 국인처럼 완전무장을 하고 출근을 한다.
병원에 오면 병원 복으로 갈아입으니 옷에 신경을 안 써도 된다.
병원복은 하얀 모래위에 고여 있는 바닷물처럼 옥색이다. 그래서 수간호사 같은가 보다.
환자들이 내게 주사 많이 아파요? 하고 가슴을 끌어안으며 무서워하신다.
척추부분에 맞는 주사니까 당연 겁이 날 것이다.
아녜요, 엉덩이 주사 허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안심을 시켜주면
주사를 다 맞고 나서 사탕 받은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웃으시며
안 아팠다면서 내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신다.
이럴 때 주사를 놓을 준비를 하고 뒤처리를 하느라 조금 수고한 내 자신에게 보람을 느낀다.
수간호사로 보이든 주방아줌마로 보이든 일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살아 있어 행복할 때가 많다.
그 대가로 추운 겨울에 방바닥에 보일러를 돌게 하고, 알맞게 익은 김장김치를 꺼내먹고,
반가마니 쌀을 베란다에 쟁여놓고, 햇볕아래 책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지난 삶이 불편하도록 궁색하고 앞뒤분간을 못하도록 모순되었던 실존들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그 기억이 희미해질 때,
그때에도 나약한 봄은 있었고 지금처럼 매서운 겨울이 있었음을…….
오늘도 12월을 시작하는 겨울 바람이 문밖에서 환자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