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 가을 바람이 아니라 초겨울 칼바람이다.
멀리서는 눈이 왔다고 하더니만 여긴 세찬바람만 골목을 휘ㅡ돌아 분다.
큰 나무의 단풍잎들을 다 떨구게 하고
떨어진 낙엽들을 제 맘데로 이리저리로 몰고 다닌다.
꼭 철 지난 바닷가처럼 파도 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구르며 내는 소리건만 바람이 심술을 부리니
인적 드문 바닷가 빈 백사장에 일어났다 쓰러지는 파도소리 같다.
바람 탓일까?
낙엽 탓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내 맘 탓일까?
결실을 하는 들판이 내 것인냥 배 불렀던 시간들이
허허롭기만 하다.
꼭 수확이 지난 빈 들판에 홀로 선 허수아비처럼
새들한테 머리를 내주고 바람한테 가슴을 내 주는
속 빈 허수아비처럼 사지가 다 너덜너덜한 유행지난 허수아비.
언제나 새들을 쫓을 듯이 용맹스럽게 두 팔을 펼치고 서 있지만
약싹 빠른 새들은 안다.
허수아비는 달리지도 못하고 때리지도 못한다는 걸....
그저 그 자리에서 사나운척만 하고 바보스럽게 서 있다는 걸...
내가 생각해도 난 바보스럽다.
용감한 척.....
씩씩한 척.....
그기에다가 착한 척까지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냥 약하면 약한데로
아프면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지쳐 쓰러져도 볼건데....
아파도 참고
힘들어도 참고
곧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더라도 강한 척 하느라 못 그러고
온 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갈 지경으로 피곤하고 더워도
잠시만 더 참자..조금만 지나면 다 끝날거야....
나 자신한테 최면을 걸면서 버텨나가고
언제나 여전사처럼 용감무쌍하게 캔디처럼....탱탱볼처럼....
백만스물 일곱번이나 하는 건전지처럼 또 일어나고
울면 안돼..울면 안돼..일곱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개구리 왕눈이처럼 희망의 피리를 불고 불고 또 불고 삘릴리~삘릴리~~~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내가 봐도 내 눈이 너무 무섭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한....
다 잊고 다 참고 다 인내하고 사는 것 처럼 보이는데
잠재된 그 무언가가 드디어 터져 버린 것이다.
뻘겋게.......
.
절대 안정.
과로 금지.
스트레스 안 받기 급선무.
그러나 현실은????
그만 팽팽한 고무줄의 한쪽 끝을 놓아버리고 싶다.
내 안에 있는 이 무언가들을 다 날려 버리고 싶다.
퍼져서 살고 늘어져서 살고싶다.
아무것도 안하고 세상에서 단 며칠간만이라도
남편이랑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
언제나 가족보다 더 먼저 챙겨야하는 할머니들과
가정사보다 먼저 해결해야하는 공적인 업무와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서도 약한 부분을 들키고 싶지 않은 쓸데없는 자존심과
크게 부지런하지도 못하면서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중압감들
세상적인 것과 세속적인 생각들이 더 많아 쫄아드는 양심
겉과 속이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느껴야 하는 실망감들...........
그러나 난 내가 그러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안다.
시간을 줘도 자유를 준다해도
놓치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안다.
왜냐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게 다 사랑인 것을.
남편도 아이들도 꽃도 친구들도 직장도
모두가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해 준 내 생명과 같은 것임을 잘 알기에
난생 처음으로 눈병이 났고
난생 처음 이런 기분이 들었다.
나도 아플 수 있는 야잔데....
나도 지칠줄 아는 여잔데.....
남편이 안타깝게 바라 보는 시선이 안스럽다.
아직은 쉬게 해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를까?
그러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다.
얼른얼른 세월이 흘러 가 주었으면...
이 힘든 시기를 다 지나고 남편이랑 둘이서 작은 꽃밭이나 만들면서
멀리 가 있는 애들 기다리는 재미로 살건데..ㅎㅎㅎㅎ
그래도 이런 시기가 가장 행복하다고 어른들은 그러신다.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작은 집 장만하고
알뜰살뜰 살림 일구는 지금 우리 나이가 젤로~~행복하단다.
20~30대는 너무 바쁘고 40 대 후반에서 ~50 대 초반 우리 나이때가 가장 돈도 많이 들어가고
가장 원숙해지는 시기라서 과일로 쳐도 가장 숙성이 잘 된 최고의 과일이라니...ㅎㅎㅎㅎ
요 시기를 살짝만 넘어가도 값어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진단다.
그럼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한다????
고지가 눈 앞에 보인다~~~
조금만 더 올라가자~~~
오르막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내리막 길이 같이 있는 법.
최정점을 향해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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