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어머니의 둘째 아들, 작은 시숙과 형님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저와는 띠 동갑인 그야말로 시골아저씨 아줌마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는 분이죠.(동갑내기 부부)
근 50평생을 형 밑에서 부모를 섬기며 형 말씀엔 무조건 순종하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작은 시누이는 말하길 “올케~우리 6남매 모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했지만
그중 제일 고생한 건 작은 오빠고 그 다음이 막내 동생이다 ”
“왜요 형님?”
“막내야 뭐 없는 집에서 지 혼자 공부하고 성공하느라 고생 제대로 했고
울 작은 오빠는 너무 가난해서 집안 살려보겠다고 학교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남의 집 머슴을 살았잖아. 그래서 마을 들어오는 초입에 모난 귀퉁이에 있는 논 알지?
그 논 사서 농사짓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가서 그래도 밥은 먹고 살게 된 거야“
전 시집가서 얼마 되지 않아 작은 시누이에게 작은 시숙의 고생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교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해 글을 간신히 읽고, 쓰는 것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큰형 못지않은 효심은 늘 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큰 형님께서 대목에는 장사를 하셔야 해서 늘 늦게 오시니 작은형님은 시댁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작은 아주버님은 형님과 함께 부모님 생신이나 명절에는 미리 오셔서 집안 곳곳을 살피시고
다른 형제들이 오는 것을 맞아주곤 하셨습니다.
사실 큰 아주버님 내외의 그늘에 가려 효자효부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도 옛날 분이신지라 장남, 장손은 늘 특별한 대우를 하셨기 때문에
작은 형님의 스트레스는 짐작이 갔습니다.
큰 형님네 조카들과 작은 형님네의 조카들은 나이차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우는 천지차이였습니다.
언젠가 늦은 밤 작은 형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입니다.
작은 형님이 속에 담아두신 이야기를 합니다.
“난, 우리는 괜찮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큰 집 아이들하고 차별 대우 받는 건 너무 속이 상하다”
처음으로 들은 작은 형님의 불평이었습니다.
전 미루어 짐작했던 이야기 인지라 형님의 아픔을 달래드렸고 우린 다른 형제들 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명절 전 이었을 겁니다.
부모님 불편하신 곳이 있나 살피시던 아주버님은 연장을 들고 들로 밭으로 다니시는 겁니다.
우연히 아주버님을 보는데 티셔츠가 올라가는 바람에 속에 대고 계시던 허리 보조대를 본겁니다.
아주버님은 허리가 아프셔서 치료를 받으시는 중이었고 일마치고 귀가하시면 아들들 보고 안마를
하라고 늘 부탁하신다는 거였지요.
하지만 부모님의 불편을 먼저 생각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얼마나 존경스럽던지....
하지만...형이 시키는 대로, 그리고 둘째의 삶을 살았던 둘째 아주버님은 형을 잃고
너무도 큰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형~~~ 난 어떡하라고..... ” 상을 치르는 내내 수없이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부터 둘째는 맏이가 되었습니다.
“막내야~ 내가 거의 50년을 동생만 해 봤는데 큰 형 노릇을 어찌 하냐?”
우리는 아주버님의 힘을 실어드리려 아주버님이 의견을 내시면
무조건 따라가는 동생이 되자고 했습니다.
전에도 그러셨지만 작은 형은 동생에게 의견을 자주 묻습니다.
“내가 뭘 아냐? 그래도 배운 네가 낫지...어떻게 했음 좋것냐?”
세상에 못 배웠다고 동생을 존중하는 건 아니라는 걸압니다.
아주버님은 동생이라도 존중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큰 아주버님 가시고 오년 후 큰 형님마저 가신 뒤 아버님도 병치레를 자주 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은 모든 형제들을 다 모아놓고 말씀 하셨습니다.
“전에는 얼마 되진 않지만 내 앞으로 된 재산은 큰 아이를 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 큰 아이는 갔고 나와 네 어머니는 늙고 아프다. 우리를 돌봐줄 함께 살 자식이 필요하다.
들어와서 살면서 마지막 가는 길 다 치워주는 자식에게 미리 재산 다 줄란다.
너희들 모두가 싫다고 하면 재산 다 팔아서 양로원인가 하는 대로 갈란다.
거기 돈만 들고 가면 치료도 해주고 말벗도 해주고 자식 없어서 죽는 날까지 편하게 산다고 하더라.
그런데 막내는 직장도 서울이고 아이들도 아직은 어리고 여기까지 들어와 살라고는 못하겠다.
그리고 셋째는 성격이 맞을 것 같지 않으니 둘째가 들어왔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이렇게 대 놓고 둘째를 찍으셨으니 순둥이 작은 형님 내외분은 바로 그 다음 날 아파트 세놓고
집수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제 남편은 하루 날을 잡아서 아버님의 것을 명의 이전하여 아주버님께로 가게 했지요.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것을 주는 것이었고 또 받을 만 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일 년이 조금 넘게 아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가실 때는 한두 달 병원에 계셨지만 그 전엔 병원을 오고 다니시면서 투석을 하셨지요.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작은 형님 내외분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짜다는 거지요.
없는 살림 일으키신 분이니 절약과 검소는 기본인데 지나치게 돈을 안 쓰십니다.
그래도 부모님께 들어가는 돈은 1/n을 하자고 하면 따라오시고,
몸으로 시간으로 하는 일은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돈이 들어가야 하는 일에는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살피고 많이 뺍니다.
분명히 아버님 어머님 모시는 조건하에 재산을 몰아 받았는데 받은 재산은 묶여 있는 것이고
수입으로만 생활을 하시려니 빡빡한 생활이 되셨던 겁니다.
어느 날 화를 내시더군요. 왜 부모님 병원비를 나만 내야하냐고?
이런......그래서 형제들 간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서울로 병원을 오셔야 할 일도 많았습니다. 수술을 세 번 정도 하셨거든요.
그런데 서울로 오시면 당연히 수술비와 입원비 모두 저희 몫이었지요. 그냥 말없이 했습니다.
바로 위의 형, 셋째는
“부모님 모시고 치료하는데 쓰라고 주신 돈은 미리 다 받아두고 동생들에게 달라고 하면 되겠냐?
없으면 대출을 받던지 아님 땅 한 귀퉁이 팔아라~“
이런 언쟁이 오고 갔습니다. 의좋던 형제들의 대화를 듣자니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서로를 이해하던 형제는 어디 갔나 싶으니 속이 너무 상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형제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어머님께서 입원을 하셔서 서산에 내려갔습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당연히 계산은 제 몫입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뭐 그래도 좋습니다. 여전히 전 둘째 아주버님을 제일 좋아합니다^^
“아주버님~~ 농사지은 것 바리바리 싸주시는 것도 좋지만 냉면도 한 그릇 사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