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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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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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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숙이 셋이다.(1)


BY 엠파이어 2009-09-09

 

 


전 시숙이 세분 계십니다. 그러니까 제 남편은 넷째아들이라는 거죠.

막내...

7남매의 맏며느리로 쉽지 않은 날들을 산 친정엄마는

울 남편이 6남매의 막내아들이라는 데에 더 큰 점수를 주기도 했지요.


제일 큰 아주버님 이야기를 해보지요.

큰 시숙은 남편의 큰형...나이는 띠 동갑

제가 남편과 4살 차이니 큰 시숙과 저는 16살 차이가 납니다.

큰 형님도 아주버님과 동갑이셨기에 울 큰 형님은 아주 나이어린 막내동서를 보신 거죠.


제 큰 시숙과 형님은 효자 효부 십니다.

부모님이 기침 한 번 하시면 병원으로 약국으로 뛰어다니시고

아침 저녁 문안 전화는 기본이고요.

통화하시다 불편한 점이 생기시면 바로 달려와 해결해 드리고

또 생선 장사를 하시는 큰 형님께서는 물 좋은 귀한 생선을 늘 들이밀어 놓으십니다.


부모님들 병원에 입원하시기라도 하면 옆에서 붙어 간병을 지극정성으로 하십니다.

병원비도 먼저 내시는 일이 많아서 늘 미안한 동생들이었지요.

해서 전에 한 번은 몰래 병원비를 내느라 원무과에 붙어 있다가 낸 적도 있었지요.

가끔 동생들이 형이 너무 고집이 세다고 불평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부모님께는 그만한 자식이 없다는 걸 다 인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시댁을 가게 되면 전 큰 시숙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존경했습니다.

형제부모가 모이는 전 날 밤엔 부모님과 동생들과 먹는다며 이것저것 사들고 들어오시는

큰 아주버님....나이는 한참 어려도 절 존중해주셨고, 예의를 항상 갖춰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얼마 되진 않지만 내게 있는 모든 재산은 큰애에게 줄 거다.’ 하셨지만

그 말에 토를 다는 동생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2002년 여름 월드컵이 열렸던 그 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 일겁니다.

새벽에 걸려온 큰 조카딸의 흐느끼는 전화.

우리 큰 시숙이 돌아가셨습니다.

주무시다가 갑자기 일어난 심장마비에 의해 옆에서 주무시던 형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그토록 생각하시고 섬기시던 부모님께도 하직 인사 없이 그렇게 가셨습니다.


그토록 동네에서도 효자로 알려진 우리 큰 시숙이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르셨습니다.

그 빈자리는 조금씩 채워지기는 하고 있지만

그 충격으로 아버님, 특히 어머님은 많은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풍이 와서 이전 언어능력의 20%를 잃으셨습니다.

그래도 의지가 강하신 분이라 잘 이겨내시고 나머지 자식들 고생 안 시키시겠다고

얼마나 열심히 치료를 받으셨던지.....


형님과 조카들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간 저...뭐라고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어서 형님의 두 손을 꼭 잡았는데

울 형님.... 옆에서 주무시느라고 가는 것도 몰랐다며 내가 쥑일 년이라며 통곡을 하시는데....

그렇게 세월이 5년이 흐르는 동안 형님은 큰 조카의 결혼을 시키셨고 아이들 위해서

또 부모님 생각해서 열심히 살아가시던 날

시어머니의 생신을 앞둔 전 날

전 남편과 시댁을 가기 전 장을 보려고 시장에 들렀는데

형님은 일찍 가게를 닫으셨고 저희는 마저 장을 다 보고 시댁으로 들어갔습니다.

작은 형님과 음식을 조금 만들고 있는데 걸려온 전화....

남편의 전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작은 조카의 목소리....

일찍 일을 마치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난히도 좁은 인도

시장에서 형님 아파트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아파트 가기 100m 즈음엔 인도 없이 차도만 있어서 위험한 길 이었는데

그 길을 걸어가실 때

차 사고가 나서 한 대의 차가 구르다가 그만 형님을 치는 사고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고 서울의 큰 병원으로 호송 중이신데

아직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알리지 말고 작은 아빠만 알고 계시라는 전화.

저희는 다른 핑계를 대고 일단 사고 현장과 경찰서를 가서 자세한 사고경위를 알아보고

다시 돌아와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어머님 생신 상을 차려드리고

일이 급해 서둘러 가야한다며 서운해 하시는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고 서울의 모 병원으로 갔습니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계신 형님을 면회시간을 기다려 뵈었습니다.

얼굴은 심하게 부으셨고 다치신 머리의 한 쪽 부분은 눈으로 보기에도 심하게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하셨고

 

형님은 이틀을 넘기지 못하시고 그렇게 가셨습니다.

 

결혼한 딸이 아들을 낳아서 백일을 준비할 무렵...그렇게 예쁜 외손주를 많이 안아주시지도 못하고...


그 빈자리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아직도 느껴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