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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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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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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일지(4)


BY 새봄 2009-08-09

 

그녀는 나보다 한 달 늦게 들어온 삼십 초반의 주부 간호사였다.

말수가 적었던 그녀는 자기 역할을 하고나면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

침묵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

 

세상엔 말수가 많은 사람도 있고, 말 수가 없는 사람도 섞여 있게 마련이다.

말을 잘해 그 조직을 조리 있게 끌고 가는 사람도 세상엔 필요로 하지만

말없이 조용하게 따라가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순조롭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말이 많다보면 실수의 말도 더 하게 되고

말이 많다보면 남의 뒷말도 너저분하게 하게 되고 담지 못할 말을 하게 되고

속절없이 시간을 때우는 걸 보게 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남의 얘기도 부질없는 불평의 말도 더러는 하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의 잡담은 나도 하고 있고, 나도 물론 나쁜 감정을 겉으로 보이게 되지만

그 정도를 지나치면 듣기도 싫어지고

참아낼지 모르고 가볍게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게 된다.

그녀의 상사는 말이 많은 여자였다. 하루 종일 사적인 말을 많이 하는데,

젊은 간호사들도 있고 환자들도 많은데 저러면 안 되는데 할 때가 종종 있다.

몇몇 간호사들은 개콘의 분장실의 강 선생처럼 “네~ 상사님~” 하면서 온갖 비유를 다 맞추고 아양을 떤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다른 간호사들 틈에 끼어 잡담을 별로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만 성실하게 소화해내는 여자였다.

그녀는 간호사들과 다른 내 위치를 알고서 가끔 내게 와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서로 힘든 부분과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한두 마디씩 하다 보니

조금 각별하게 친분이 생기게 되었다.

대부분 이십대인 간호사들과 나는 일 얘기만 간단하게 하고

서로 깊은 얘기는 못할 수밖에 없는 공존하면서도 공존할 수 없는 얇은 벽이 있게 마련인데

그녀는 나는 비밀을 조금은 풀어낼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일을 하다보면 중요한 시술용 기구가 없어지는 경우가 더러더러 있다.

그때마다 그 걸 누가 썼고 누가 분실했는지 역추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원점은 항상 나한테로 넘어오게 되는데,

모든 시술용 기구는 내손에서 씻어지고 소독이 되기 때문이다.

서로 나는 아니라고 했다가 씻고 소독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게 제일 심증이 간다며

못 봤다고 해도 내가 일하는 곳을 샅샅이 뒤지게 된다.

참으로 답답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런 뒤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나 대청소를 하다보면 간호사들이 일하는 틈새에서

잃어버린 기구들이 나오게 되었다.

못 봤다는 내 말은 무시하고 나를 의심한 부분을 짚고 넘어갔으면 했지만 모두들 모른 척 했다.

그러나 그녀만은 내게 와서 간호사들이 안 그랬다고 한 부분은 정말 잘못된 거라고

여사님 잘못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녀가 고맙고 된 여자구나 했었다.

 

말없는 그녀의 장점을 말 많은 상사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맞지를 않았다.

톱니가 어긋나면서 시간은 자꾸 틀려지고

결국 시계는 너무 많은 시간의 오차를 보이게 되었으므로 그 공간에서 버려지게 마련.

상사는 결국 그녀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었고

그녀는 내게 빌려간 법정스님의 책 ‘아름다운 마무리’와

편지를 써서 내 탈의장에 남기고 직장을 그만 두고 말았다.

“더 이상은 나올 수가 없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 지내세요…….”

 

그녀는 내게 책을 빌려가면서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평온해질까요? 물어봤었다.

그럼요, 세상이 버거울 때마다 법정스님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비우게 되던데요, 했었는데…….

 

비움도 한계가 있다.

벗으려 해도 다 벗으면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자존심을

말 많은 상사는 그 말 많음으로 해서 그녀를 보내버렸다.

 

그리곤 상사는 자기 합리화를 시키려고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이상한 여자로 나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상사님과 맞지 않았을 뿐 이상한 여자도 나쁜 여자도 아닙니다.”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고요.”

“아니요, 그녀의 손에 비수는 없었습니다.”

상사는 분홍색 아이샤도우를 칠한 눈을 치켜뜨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와 연락하세요?”

“아니요.”

사실이다. 그 후 그녀와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연락하면 여기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킬까봐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만 위로의 문자만 몇 번 보내고 아름답게 마무리를 했다.

 

아름다운 마무리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고, 여기가 끝이 아니고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날들을 살다보면 여기가 끝이 아닐까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종점은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는 것임을 나는 수도 없이 많이 겪어왔다.

 

말없는 그녀가 우리 사회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나는 알고 그들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