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16회
최후(最後)의 보루를 찾는 패찬병(敗殘兵)처럼
병원을 옮기자는 이야기는 벌써부터 나왔었다. 오진(誤診)도 있을 수 있고, 의사에 따라서는 그 소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두 딸의 주장이다. 그러나 긴 시간을 쭉 지켜 본 사람들이 환자에 대해서 더 잘 알 것이라는 게, 남편의 반론이고 큰아들이 이에 동조(同調)한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면 다시 처음부터 검사를 해야 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느라고 환자가 지친다는 게 또 한 이유다. 그러다보면 날짜만 가고 공연히 치료시기만 놓치게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도 옳다.
나는 원래 남편의 말을 잘 듣는다. 그이의 이견(異見)을 따라서 손해 보는 일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모든 일에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그이다. 그렇다고 ‘이래라’, 또는 ‘저래라’ 식으로 명령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떤가?’하는 식으로 하면서도, 그러나 자기주장을 곧게 펴는 사람이다. 병원을 옮기는 문제도 그렇다. ‘나는 이 병원에 그냥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생각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껏 그이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 왔다.
막내 딸아이가 아주 늦은 퇴근길에, 제법 두툼한 파일을 들고 현관을 들어선다. 병원을 옮기는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자고. 이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인가 보다. 사실은 나도 담당교수와 외래로 면담을 하고는 실망이 크다. 교수는 치료에 대한 자신감도 수술에 대한 자신감도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열어보고…….’, ‘환자의 상태를 본 후에…….’ 이런 식으로 빙빙 돌리지 않는가. 병원에 대한 믿음도 회의적이다. ‘암이다.’, ‘암이 아니다.’를 두고 며칠씩 대립을 하다니. 소위 말해서 대한민국 굴지(屈指)의 대(大)종합병원(綜合病院)에서 말이다. 2차 항암에서의 의료사고도 그렇고…….
딸아이가 펼쳐놓은 파일에는 식도암 수술의 국내 권위자 리스트가 들어 있다. 어느 의사가 몇 년 동안 몇 명을 수술했는가. 그리고 그 성공률은 어느 정도이고, 사망률은 얼마인가가 한 눈에 쉽게 다가온다. 그들의 집도 사례와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사례도 한 묶음이다. 다른 것 다 제쳐놓고, 내 눈은 수술 성공률 100%에 사망률 0%라는 어느 의사의 보고서에 머물러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는 제시된 명의 중에 가장 나이가 젊은 박사다. ‘수술성공률 100%에 사망률 0%라…….’ ‘그리고 차세대의 리더라…….’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의사들의 설문조사에서, ‘내 가족의 수술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하는 물음에 월등히 많은 표를 얻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내가 암환자라는 것도, 젊은 의사가 노련한 의사를 제치고 맞춰냈지 않았는가. 인터넷이 이렇게 위대한 힘을 가졌고, 그래서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한참 뒤에서야 하게 됐다.
“아빠. 옮겨 볼까?”
나는 아직도 남편을 ‘아빠’라고 부른다. (그이는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별로 싫은 내색이 없어서 나도 그냥 그렇게 부른다. 애교의 한 방법이기도 하고)
“당신이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근데 나는…….’하며 꼬리를 붙인다. 나는 믿음이 가지 않는 부분을 조근조근 설명한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그이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환자가 병원이나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면 안 되지. 옮겨. 당신이 그러고 싶으면 옮겨.”
우선 옮길 병원부터 내원해서 의논을 하자는 막내 딸아이와, 아무런 차트도 없이 맨손으로 가면 그들이 뭘 보고 뭐라고 하겠느냐. 차트를 챙겨서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서 만약 다른 의사가 맡았던 환자라서 못 받는다고 한다면, 그때는 오도가도 못 하고 낭패라는 것이 큰아들의 소견이다. 더욱이 이미 2차 항암까지를 끝낸 단계인데, 그리 쉽게 받아 주겠는가도 문제 삼는다. 이렁저렁하다가 이틀이 간다. 나보다도 마음이 급한 건 막내딸이었던가 보다. 딸아이가 제 오빠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고 한다. 엄마 병이 보통 병이냐고. 빨리빨리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장자라는 사람이 왜 그러고 있느냐고. 에구구~. 못난 어미 때문에 전례 없던 형제애(兄弟愛)에 금이 가게 생겼구먼. 그래선 안 되지. 내가 서둘러야겠다.
우선 환자를 의사에게 보이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하자는 게 내 제안이다. 지금 상황이 이러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이실직고(以實直告)하자.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워낙 이름 난 명의라서, 예약을 하고도 기다리는 데에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고 한다. 인터넷이라는 물건은 절대로 예외라는 것은 없기 마련이다. 전화예약을 시도하니 2주일 뒤로 예약이 될 것이고, 수술은 적어도 두어 달쯤 뒤에나 하게 될 것이라는 간호사의 말이라고. 어차피 지금 병원에서 3차 항암을 시작하려면 보름은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수술까지는 몰라도 면담을 하다가 여차해서, 다시 지금의 병원으로 간다 해도 날짜는 충분하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막내 딸아이가 사정을 해서 1주일 뒤에 명의와의 예약이 결정 됐다. (이제부터 나는 그를 ‘명의’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그 명의는 다른 의사와 달라서 면담 시에 세 명 이상의 보호자를 필히 대동하라는 조건이 있다고 한다. 그러지, 뭐. 그게 문제인기. 큰아들이 조퇴를 하고, 큰딸이 회사에 양해를 얻고, 막내딸이 시간을 내서 남편과 나, 이렇게 다섯이 가기로 했다. 누군가 빠트릴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묻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하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젠 최후의 보루를 찾는 패찬병(敗殘兵)처럼 각오가 남다르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매달려야지. 살려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