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 간 년’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서 50년 전 술집 외상 장부를 보고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서울 중심가 명사들이 드나드는 술집, 단골손님들의 이름을 몰라 명사들의 특징을 적어둔 ‘필동 건달’ ‘게 잘 먹는 놈’등 그 외상장부를 서울역사 박물관에 보존 한다기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어지지 않는 그 비슷한 옛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외상장부, 어디에 술집에만 있으랴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거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60년대 중반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졸업과 동시에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 KT&G 전신인 대구연초제조창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담배생산이 완전 기계화가 되기 전이라 수작업이 많았다. 자연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아가씨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일을 했다. 입사한 배경도 각각이었다. 국영기업체이기에 직위도 기능직 공무원이라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신분보장이 되어 있었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렵던 시절, 비록 기능직이라 할지라도 그 채용자의 배경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많았기에 현장 상사들도 함부로 대하지를 못하였다. 군사정부 때라 육이오 미망인, 유자녀, 국가유공자 가족이 우선으로 특채되었다. 제일 번성기 때 회사원이 약 2,000명이라고 기억되니 거대 시장이기도 했다. 여자 종업원이 많아 가정 살림에 필요한 물건이 쉬는 시간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다. 백화점에서 온 일류 의류에서 반찬까지 봉급 다음 날에는 외상 값, 계금 각종 돈이 오가느라 현장에는 한참동안 술렁거렸다. 유머가 넘치는 혼자 사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내가 20대일 때 아주머니가 40 중반이니 한참 위다.
어느 날 현장에 다녀온 계장님이 우스워 죽겠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인즉 아주머니가 외상값을 받으려니 전 공장직원 이름을 기억하질 못하여 자기만 알도록 외상 장부를 정리한 것이었다. 장부에는 ‘거센 홍씨’ ‘딸기코’, ‘벼락가다’ ‘김 탁배기’ ‘마누라 많은 놈,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사람을 나름대로 아주머니만 알도록 적어 두었다. 문제는 ‘살로 간 년’ 이었다. 육이오 미망인으로 특채되어 혼자 살다가 재직 중 재혼한 아주머니에게 붙여준 장부상 이름이었다. 돈을 주고 치부장을 들여다보는데 ‘살로 간 년’에다 연필에 침을 발라 줄을 쓱 긋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아주머니는 “그라마 살로 갔지, 죽을라고 갔을까봐. 멀쩡한 이름 놔두고 살로 간 년이 뭔기요?” 너 댓 살 아래인 주인공은 분을 못 삭여 싸우려는 기세였다고 한다.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져 아주머니는 당황스럽고 난감 했다. 그러나 그분의 특유한 기지로 “너는 그래도 살자고 하는 사람이 있어 살로 간 게 아니가? 나는 살로 가고 싶어도 아무 넘도 살자고 하는 넘이 없다. 이 많은 과부들 중에 너는 뽑힌 사람 아이가 흉이 아니다 진정해라.” 우스개를 섞어가면서 간신히 달래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고 했다.
전쟁을 겪은 아주머니들의 애환, 점심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휴게실에서 모여 한을 토하는 살아있는 증인들, 가끔 지방 신문, ‘주부일기나 소쿠리’ 또는 직장 사보에 실리는 내 글을 보신 분들은 자기네들의 한을 박 여사 같으면 책이라도 엮을 거라면서 가족이 엮어준 맺힌 한을 풀어 놓는다.
희생을 미덕으로 받아드려지던 세대, 대구에 유학 온 시댁 조카와 시어머니 모시고 살다가 혼자 된 지 20여 년 만에 재혼하려니 시어머니와 시숙이 통곡하더라는 분, 철없는 나이에 결혼 해 신랑 전사통지서 받고 석 달 후 시숙 전사통지서에 통곡하는 동서를 달랬다는 분, 결혼 직후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전사 통지서를 받았는데 그새 아이가 생겨 호적에 올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분, 각가지 사연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정년 되어 나가면 우리 신랑 대 이어줬다고 유족연금도 준다.” 기억도 희미한 영감이 됐을 나이의 남편을 신랑이라 부르면서 이마의 주름처럼 골이 패인 한을 고마움으로 미화하고 계셨다. 부모님이 철없는 나이에 맺어준 인연, 정분도 쌓이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자식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났다고 하신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시는 어머니는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면서 자식을 키웠다. 그 어머니들의 정성으로 교수로 의사로 판검사로 어머니의 아픈 한을 보람으로 바꾸어준 자식들도 많아 퇴직 할 때쯤에는 주위에 부러움을 산 분 들도 많았다.
자기주장이 강한 요즈음 젊은 여자들은 무조건 희생하고 살려고 하지를 않는다. 뜻이 맞지 않아 이혼하는 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세상이다. 더구나 상대가 가고 없는 재혼이라면 적극 권장하는 세상이다. 부모들이 오죽하면 둘이 애 데리고 살면 효자라고 하지 않는가? 전사한 남편 덕에 직장을 얻었다가 혈육 한 점 없는 젊은이가 재혼했다고 붙여준 별명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살로 간 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 공장 유명세를 탔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한 끼 밥을 걱정하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던 우리 어머니들이 몸소 보여주신 반듯한 자식 교육은 후세들이 본받을 점이다. 그분들이 키워 준 자식들의 힘으로 우리나라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살로 간 년’ 전쟁이 남겨준 상흔이다.
그 분들 말씀은 시대를 잘못만나 된 과부는 팔자도 운도 아닌 세월 탓 이라고 하셨다.
나라에서 새끼하고 살라고 직장까지 챙겨주니 우리는 직장이 신랑이라고까지 했다. 밥 먹게 해주지, 자식 키울 돈 주지, 세월 죽여주지, 이만한 남편도 없다면서 긴 세월을 살아오셨기에 농까지 하실 여유로움도 보여주셨다.
남편을 나라에 바치고 새 둥지를 찾아간 미망인에게 당시는 동네서도 재혼하는 걸 꼭 살로 갔다고 했다. 친척 고모는 재혼 후 친정 발걸음을 끊었다. 스스로 가문에 흠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하고 사고도 변했다. 그런 사건들은 지난 세월에 이야기일 뿐이다. 육십 중반에 와 있는 나는 80을 훌쩍 넘어 생사도 알 수 없는 그 때의 주인공들이 생각이 난다.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그 외상장부가 그분들의 장부라 오래 전 일이 내 앞에 그려진다. ‘살로 간년’ 아주머니는 어디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실까? 또 외상장부의 주인공도 신문 속에 주인공이다. 그 때의 한을 토하던 어려운 시절의 산업역군이었던 모든 분들과 동료들이 보고 싶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