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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러 가는 것 처럼 왜 이래?


BY 장화자 2009-06-08

이분의 삶을 함께 공유해보고 싶은 마음에 글을 퍼왔습니다..

 

 

 

내 삶의 새 봄 [여성생활수기/우수작] - 장 화 자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모두들 들떠 있을 무렵, 나는 옷장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살림살이도 정리하고 옷가지들까지 품목별로 정리를 해 놓았다.
“죽으러 가는 것처럼 왜 이래?”

단골 세탁소 아줌마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내 살아 온 발자취를 더듬으니 이렇다 내 놓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몇 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 유서도 쓰기 시작했다. 15년을 같이 살아 준 남편께 정말 도리가 아닌 줄 알지만 다른 여자 만나 남은 인생 행복하게 살라고 부탁의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 같은 여자를 많이 사랑해 주고 같이 살아줘서 너무 고맙고 행복했다고. 눈물이 하염없이 났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초겨울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아 평소 다니던 병원 주치의 선생님께 증상을 얘기했는데 선생님은 벌써 알고 계셨다는 듯이 초음파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불안에 떠는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이 없다. 한참을 그러고 계시다 주먹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시며 외과 선생님과 상의를 해보라며 그 쪽 선생님 진료시간에 맞춰 예약을 해 주신다. 너무 겁이나 목 밖으로 말이 나오다 다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저, 수술해야 하나요?”라고 물으니, “우리 심장에는 심장으로 들어오는 혈액이 한쪽 방향으로 흐르도록 해주는 판막이 4개 있습니다. 이 4개의 판막은 각기 제 기능을 잘 해서 우리 몸 곳곳까지 피를 잘 돌게 해야 하는데 지금 환자의 경우엔 3개의 판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 하는 경우입니다. 한꺼번에 3개의 판막을 수술할 수 있을지 외과선생님과 상의해 보세요.”라고 말씀하신다.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면서 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떻게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 삶의 첫 장의 기억은 언제나 슬픔으로 시작 된다. 다섯 살쯤이었을까? 나에게 밝고 고운 웃음소리는 다섯 살을 끝으로 사라진 것 같다. 아버지는 딴 살림을 차리셨다. 언니는 초등학생, 오빠는 병중이었다. 아래로 두 동생을 데리고 살기가 버거워진 엄마는 나를 늘 아버지 집으로 보내셨다. 그 곳의 엄마는 나에게 참으로 혹독했다. 얼음이 꽁꽁 언 시냇물을 깨고 여물지도 않은 조막만한 손으로 빨래를 빨기도 했는데, 이런 나의 어려움이 십리 밖 엄마 귀에까지 전해지는 날이면 거품을 물고 달려온 우리엄마와 그 곳 엄마는 혈전을 한바탕 치른다. 하지만 가련한 우리 엄마는 늘 맹수 앞에 힘없이 누운 작은 짐승마냥 마당에 나뒹굴었고 그때마다 양동이 채 물벼락을 맞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소금을 사오라고 그 곳 엄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가지 않았다. 매질은 시작되었고 난 기절을 했다. 그 후로 나는 깊은 병마와 싸워야 했다. 6살 어린 나는 방에 혼자 누워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또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십리 밖 우리 엄마 집에 데려다 주셨고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병은 나았지만 여덟 살의 초등학생인 나는 보건소의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심장이 안 좋은 것 같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모심던 차림으로 학교까지 한달음에 뛰어가서 그 말을 확인을 하고 돌아오신 우리엄마는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2년 전 심장병으로 아홉 살 아들을 먼저 보내고 들일을 할 때마다 통곡하던 엄마를 종종 보아오던 터라 어린 마음에도 엄마의 절망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늘 걱정거리였다.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엄마의 노력은 더욱 엄마 몸을 힘들게 했다. 서울생활을 해 볼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 온지 이틀 만에 급보를 받고 집으로 가니 엄마는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 한 채 일 년을 누워 계셨다. 그 때 내 나이 스무 살.

엄마는 이듬 해 겨울의 깊은 밤, 어린 자식들만 남겨 둔 채 가야한다며 서럽게 우시더니 며칠 후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 무렵 아버지도 시름시름 아프다며 누워 계셨다. 엄마 장례식에 오신 작은아버지는 엄마 상여가 집을 나서기도 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도회지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가셨다. 오후 늦게 힘없이 돌아오신 작은아버지는 “너희 아버지 병이 많이 깊어 가망이 없어 다시 모시고 왔다.”고 하신다. 폐암 말기로 이미 모든 장기에 전이가 된 상태라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한 달 가까이 고통 속에 사시다 엄마 뒤를 따라 가셨다.

우리는 일년을 넘게 누워 계시던 부모님을 보면서도 한 번도 돌아가실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두 분의 죽음은 우리들 삶을 완전히 바꿔놓고 말았다. 나에게 남겨진 무거운 책임감을 감당 할 수 없어 밤이면 잠자는 어린 동생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울다가 정신이 들었다. 자다가 혹시 일어나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까 싶어 그날 이 후로 다시는 울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직장을 나가 생계를 꾸려야 했고 동생들 보호자가 되어 3년을 살고 나니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24살 친구들은 그럴듯한 사랑도 하고 디스코장을 다니며 아름다운 청춘을 보내고 있을 때 난 수술을 받았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라는 표어를 외치며 선진국으로 진입한다는 그 설레임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서울 올림픽이 있던 1988년 그 해 6월 난 처음으로 심장수술 중 가장 쉽다는 승모판막 1개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 갓 중학생이 되는 막내 여동생과 고등학생이 되는 남동생을 두고 차마 죽을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수술을 받고 힘든 회복기를 걸쳐 몸이 나아질 무렵부터 정말 열심히 일했다.

돈이 없어 큰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한 엄마를 보낸 후 나는 결심했다. 돈 없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살다 죽는 일이 절대 있어선 안 된다고.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살아생전 늘 걱정만 드렸던 나로선 효도 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효도 할 수 있는 일은 엄마가 남겨 놓고 간 동생들 잘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 때 이미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상태였지만 심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착한 남편은 동생들과 어렵게 사는 내 딱한 형편을 다 이해했고 동생들 공부도 시키겠다며 나한테 청혼을 했었다. 많은 고민 끝에 허락을 하고 시작한 결혼생활이었지만 동생들 데리고 월세방에서 시작한 나의 신혼 생활은 평탄 할 수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술비가 없어 동냥을 하듯 친척집에 가서 사정해서 수술비를 마련해 수술을 하긴 했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남편도 시댁식구도 탐탁치 않은 내색이다. 남편의 방황은 계속됐고 몇 번이나 헤어질 결심을 했지만 인연의 끈이 무엇인지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동생들은 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떠났고 난 삶의 끈을 놓아 버린 것처럼 방황이 시작 됐다. 그리고 남편과 갈라설 결심을 하고 무작정 동생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내가 평소하고 싶었던 요리학원에 등록해서 조리사 자격증을 땄지만 생각처럼 요긴하게는 쓰지 못했고 그냥 음식점 허드렛일을 하며 언젠가는 나도 이런 음식점 사장이 될 거라는 희망만 품고 살고 있었다. 다른 여자 만나 아들 딸 낳고 잘 살아 보라고 자리를 비켜 주고 왔는데 남편은 사업을 정리해서 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많은 고민 끝에 남편과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 했다. 난 더 배우고 싶어 출장 요리를 시작했고 남편은 사업을 시작했다. 1998년 IMF사태가 터졌다. 우리의 부푼 희망은 무참히 짓밟히고 남편의 방황은 다시 시작되었다. 남편의 방황이 심할수록 난 더 많은 일을 했다. 그 때 난 알았다. 일을 하는 동안은 아무런 잡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여 내 육체와 정신을 더욱 혹사시키며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법정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란 책에서 나오는 ‘크게 버리면 크게 얻는다.’라는 구절을 실감하듯이, 남편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업을 정리하여 방황을 끝내고 새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내 몸 속에서 이렇게 큰 일이 일어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바보스런 내 자신을 책망해 보고 사람들을 향해 원망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늘을 보니 너무나 맑았고 겨울을 막 털어내고 봄을 맞아들인 대지엔 형형색색의 빛들로 눈이 부셨지만 세브란스병원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눈물이 앞을 막아 발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간 세월이 너무 허무하고 서러워 억울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심장판막이 다 망가졌을까?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참아왔는데 고작 이런 결과를 보려고 그랬단 말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내내 울었다. 집에 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정말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날 것 같은 절망감에 울고 또 울었다. 가족들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나를 다그친다.

“ 아니 몇 년을 꼬박꼬박 병원 다니면서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또 의사선생님은 왜? 이 상태가 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냐? “

병원에 항의하겠다고 난리들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절망만 할 수는 없었다. 죽든 살든 이쯤해서 내 인생을 뒤돌아 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해야 할 일부터 차근차근 챙겼다.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슬프게 우는 모습보다는 당당하고 야무지고 화사한 모습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앞섰다. 얼굴에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옷도 예쁜 ??골라 입고 먹는 것도 잘 챙겨 먹으며 만나는 사람들한테 웃어주니 그 사람들 마음이 더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이렇게 마음의 평정을 찾고 평온해질 무렵 외과선생님과 면담시간이 다가왔다. 그 동안 한번도 내 병원 길에 동행해 주지 않던 남편도 열일을 제쳐두고 따라 나섰고, 조금 멀리 사는 동생도 이른 아침 출발해서 병원 길에 동행해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의사선생님 앞에 앉으니 “빨리 수술합시다.”난 귀를 의심했다. 우리에겐 그렇게 무시무시하던 그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가볍게 말씀을 하시는 의사선생님을 쳐다보며, “정말로 저 수술 할 수 있어요?” “3개를 다 못 하면 2개라도 해 야죠.”

우린 너무나 기뻤다. 한결 기분도 좋아졌고 금방 수술만하면 훨훨 나비가 되어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수혈 문제가 제일 걱정스러웠다. 나는 자기가 직접 수혈을 해서 수술을 하는, 자가 수혈 방식을 택했는데 1주일에 한번씩 3주일 동안 수혈을 하면 되었다. 내가 나를 위해 헌혈을 해야 한다. 헌혈에 적합한지 여러 가지 반응검사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고 굵은 링거 줄을 통해 내 몸에서 피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정신은 아득하고 몸은 누워있는 침대 속으로 빨려들 것 같았다.

이렇게 수혈을 하고 나니 간호사님은 “다음 번에는 수혈 못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했던 혈액은 폐기처분되고 다른 분 혈액을 써야 하니 몸단속 잘 하세요.”라고 한다.

정말 이제는 앉았다, 일어설 기력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만 피곤하면 코로 입으로 혈액이 역류돼서 나온다. 이를 악 물고 하루에 한번 먹던 빈혈약을 하루에 두 번 씩 먹으며 최선을 다 했다. 마지막 수혈을 하러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니 수혈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수술준비가 끝나고 입원 날짜가 다가왔다.

4월 5일은 38번째 맞는 생일이었다. 동생들은 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생일 파티를 조촐하게 열어 주었고, 조카 녀석들 손에 장미꽃 다발을 들려서 내게 주었다. 난 그 꽃이 너무나 소중해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날의 아픔이 그대로 거기에 남아있기라도 하듯이 동생들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오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생일 선물은 항상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들꽃 다발을 받던 먼 옛날 기억이 선명하다.

부모님 가시고 시골집을 정리해서 읍내로 나와 동생들과 월세방에서 살 때 처음 맞는 내 생일이었다. 해가 저물도록 들어오지 않던 막내여동생이 지천에 피어있던 들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등 뒤에 감추고 와서 “언니 생일 축하해. 내가 커서 돈 많이 벌면 좋은 선물 사줄게.”라며 말했다. 그 때 열두 살이었던 막내 동생은 부모님 안 계신 흔적도 없이 맑고 밝게 자라 스물아홉이 되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해 막 입덧을 시작했지만 내 병원 생활을 돌봐준다며 아예 옷가지 등을 챙겨 우리 집으로 옮겨 왔다.

“간병인을 쓰면 안 될 까?”라고 말하면, 동생은 “언니 성격 뻔히 아는데 어떻게 간병인 쓰라는 말을 할 수 있어!”라며 극구 반대다. 내 성격이 어떻다고. 하기야 조금 까다롭고 늘 주고만 살아서 그런지 받는 걸 잘 못하고, 남을 부리는 것도 서툴러 말도 제대로 못 한다. 그러니 동생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겠지. 무엇보다 엄마 대신 나를 의지하며 살아 온 동생이 나 없는 세상을 생각하기도 싫었겠지.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그 말을 듣고 나보다 더 서럽게 울던 동생이었으니….

내 살아오는 동안 어찌 좋은 일만 했겠는가? 알게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상처를 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할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다 용서해 주고 싶었다. 길지도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서럽고 슬펐지만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으니 위안이 되었다.

이런 모든 사연을 가슴에 간직한 채 시골에서 내 간병을 위해 와 준 시누이와 막내여동생과 짐을 챙겨 들고 병원으로 향하면서 옛날 엄마들이 애 낳으러 들어가면서 ‘다시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나?’ 했다던 말처럼 ‘내가 다시 건강한 몸으로 이 집에 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니 자꾸 뒤가 돌아봐 진다. 4월 7일 봄빛은 따사롭고 온 대지는 따사로운 봄빛을 받아 형형색색의 봄 색깔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병실을 배정 받고 짐을 풀었다. 그 곳에는 많은 환자들이 수술을 했거나 혹은 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사연도 많고 병명도 각자 다르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걱정도 해주고 때로는 용기를 주며 힘든 고통의 시간을 참아내고 있었다. 수술을 하려면 많은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한번 수술을 받아 본 경험이 있어선지 나는 좀 더 능숙하게 그 절차들을 따라 하고 있었다. 모든 검사가 다 끝나고 수술 날이 다가 올수록 마음은 불안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었다.

드디어 4월10일. 수술을 받는 날이다. 사형선거를 받아 놓은 사형수의 마음이 이럴까? 죽든 살든 차라리 빨리 수술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고 수술 받고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생각이 든다. 수술 전날 언니와 동생들 그리고 친척 분들, 이웃사람들, 친구들이 바쁜 와중에도 찾아와서 용기를 주고 갔다. 그들이 갈 때마다 엘리베이터까지 마중 나가 웃으며 배웅했다. 어쩌면 이것이 내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르기에. 그리고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남편한테 당부했다. 내일 아침 수술실에 들어가는 내게 눈물 보이지 말라고. 죽으러 가는 게 아니고 꼭 살아서 돌아올테니. 이 건 내 간절한 바람이었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동생이 아기를 낳으면 누가 뒷바라지를 해 줄 것이며 혼자 남을 남편은 어떻게 살아갈까? 결혼을 하면 내 몸은 내 것만이 아니고 당신 것이고 동시에 우리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연로하신 시어머님께 이 큰 불효를 어찌 할 것인가? 전화를 할 때 마다 꼭 살아서 만나자 하시며 말끝을 맺지 못 하시는 어머님이셨다.

수술하는 날 아침, 일찍 찾아 온 언니와 동생들 그리고 남편에게 난 환하게 웃어주며 수술실로 실려 갔다. 이것이 내 마지막 인사가 되더라도 늘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꼬박 하루 만에 눈을 떴다. 심한 갈증과 고통 때문에 눈을 뜨니 푸른 옷을 입은 간호사가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르는 이곳이 지옥은 아니구나!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목에는 굵은 호스가 꽂아졌고 온 몸에는 기계들로 나를 결박 해 놓은 것 같았다. 물이 너무나 먹고 싶어 “물 좀 주세요.” 해도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옆으로 다가온 간호사 손을 끌어와 ‘물’이라고 손바닥에 써주니 2시간 후에 주겠다고 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자꾸 ‘물’ 이라고 손바닥에 써주니 물에 젖은 거즈를 입 속에 밀어 넣어 준다. 그 꿀맛 같던 물.

새 생명을 얻은 기쁨은 잠시였다. 온 몸 속으로 파고드는 통증을 호소하면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것처럼 그 때마다 진통제를 놔 주는 간호사. 사방을 둘러봐도 아는 얼굴 하나 보이지 않고 그 큰 중환자실에 나만 덩그러니 누워있는 것 같은 황량함.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안도감이 있어 견딜 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푸른 가운을 입고 머리엔 푸른 모자까지 쓴 그이가 나를 향해 웃으며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반가웠다. 그렇게 그이가 반가운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이. 조금 서툰 행동이 그날 따라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새 생명을 얻었고 병실을 옮겼다. 병실 밖의 풍경은 깊어 가는 봄과 함께 더욱 화사하게 변해 가는데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누워있는 나는 고통과 싸워야 했다. 시간 맞추어 놔주는 진통제로 내 고통을 덜 수 있었지만 그 약의 독함으로 인해 뭘 먹을 수도 없었고 토악질을 해 댔다. 그래서 난 주사를 맞지 않고 그냥 참기로 했다. 통증이 시작 되면 땀을 줄줄 흘리며 입술을 깨물면서 참았다. 나의 살아남을 축하해 주러 천리 길을 마다 않고 봉고차를 타고 시댁식구가 단체로 와 주셨다. 함박웃음으로 나를 반기는 연로하신 시어머님. 정말 미안했지만 내 살아가는 동안 정성을 다해 그 분께 잘 해 드릴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마음씨 착한 시누이들. 그네들한테도 친언니 같이 서로 도우며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살리라 다짐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수술은 11시간 동안이나 계속 됐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누워 있었는데 남편과 가족들은 수술실 밖에서 애를 태우며 10년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께 눈물로 기도하며 내 수술의 성공을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나를 눈물 나게 했다. 교회라면 질색을 하는 바로 밑의 남동생이 한 날은 선교활동으로 배포되는 전단지에 그 교회 와서 물만 마셔도 모든 병이 감쪽같이 낫는다는 내용을 보고 이것이 참이라면 “내가 천리 길이라도 우리 누나 데리고 갈텐데….”라고 이야기 하더란다.

이런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으로 나는 새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내게 생명을 주시느라고 고생하셨던 의사선생님들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 시키는 대로 회복훈련을 따라 했다.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 눈빛이 촉촉이 젖어드는 남편한테 미안한 생각뿐이다.

병원의 하루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혈압과 체온을 재고 몸무게도 체크한다. 그리고 먹은 양과 배설 양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한다. 제일 싫은 일은 피 뽑는 일이다. 한쪽 팔에 링거 바늘을 꼽고 다른 한쪽 팔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데 그때 처음 안 사실인데 양쪽 팔에 혈관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왼쪽보다 오른쪽 혈관이 발달한 경우라 오른쪽 팔에 링거가 꽂아진 날에는 혈관을 찾느라고 애를 먹어야 했다. 어느 날 몇 대롱씩 뽑다 보면 피는 나오지 않고 하얀 거품만 뽀글뽀글 나온다. 이런 날이면 잠시 쉬었다 다시 뽑아야 했지만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들을 치러야만 병원을 나가는 날도 빨라질 테니까.

앞가슴엔 훈장처럼 기다란 흉터가 있다. 가슴뼈가 시작되는 첫마디부터 끝나는 곳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흉터다. 그 걸 들여다보면 나의 독함에 내 스스로 치를 떤다. 살아보겠다고 가슴뼈를 두 번씩이나 자르다니. 자른데 또 자르고….

아침밥 먹기 전에 젊은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흉터 소독을 해주신다. 그 시원함이란! 난 그 젊은 의사선생님들이 너무나 대견하고 미더웠다. 입원하기 전 모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예전엔 의사의 꽃으로 성적이 상위권에 든 학생만이 지원 가능했다는 흉부외과에 지원자가 없다는 내용을 보면서 많이 걱정했는데 그들을 보니 너무 고마워 아파도 난 참아 줬다.

아침을 먹고 나면 주치의선생님 회진시간이다. 내 주치의 선생님은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어려운 수술인데도 잘 참고 병원생활 잘 한다며 응원 말씀까지 해주신다. 나는 어떻게든 빨리 회복을 해야 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팔에는 링거 호스가 연결돼 있고 심장 속으로 연결 된 호스를 통해 몸 밖으로 흘러나온 물을 받아야 하는 통이 3개나 내 몸에 매달려 있어 혼자서 화장실은커녕 갈라놓은 가슴뼈 때문에 일어나기도 힘들었지만 나의 투정을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임신 3개월째로 막 입덧을 시작한 동생은 지쳐가고 시골에서 내 간병을 위해서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를 둘째 시누이한테 맡겨 놓고 올라온 막내시누이도 시골로 내려가야 했다. 이렇게 가족들은 나를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내 옆에 붙어있어 한결 든든하고 용기가 났다.

지금도 가족들한테 고맙고 미안한 생각뿐이다. 시누이한테 화장실에서 소변을 받아 양을 검사하고 버리게 한 일이 너무나 미안해 몇 번이나 이런 일 시켜 미안하다고 하면 한마디 말도 못하게 잘라 버린다. 절박한 마음에 몸에 좋다는 음식을 억지로 먹고 앉아 있으면 건너편에 누워 있는 젊은 아줌마가 맛있냐고 묻는다. 그 아줌마는 친정엄마의 간병을 받으며 온갖 투정을 다 할 수 있지만 난 누워 있는 그 자체가 가시방석이다. 그때 난 알았다. 달디 단 사탕이 그렇게 소태를 먹는 것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을…. 단 맛 나는 과일도 음료수도 먹을 수가 없다. 오로지 물과 밥과 토마토 그런 것들만 먹을 수 있었다. 체력을 다 소진 시키고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육체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과 내 의지만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할 때마다 부모님이 안 계신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이런 모습 보면서 가슴 아파할 부모님께 끼칠 걱정이 얼마나 불효가 될 것인가? 하지만 수술을 받고 회복기에 접어들어 옛날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 생각이 날 때마다 부모님 안 계신 게 너무나 서글퍼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행복한 편이었다. 병원에 가면 사연도 많고 아픈 곳도 가지가지다. 갓 서른의 젊은 아줌마가 말기 폐암 진단을 받았다. 아이도 어린데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그래도 그 아줌마는 자기병을 모른다고 했다. 늑막암 판정을 받고 이렇게 죽을 수 없다며 울부짖던 50대 아줌마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늘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 같다.

‘내가 설마….’ 그래서 작게 아픈 걸 오래 방치하다 보면 이런 무서운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영원히 사는 사람이 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만 빨리 죽고 나중 죽고 하는 그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건강관리 잘 하며 다시는 무시무시한 수술대에 눕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사람들 앞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니 아프단 말도 할 수 없었다.

10일이 지나고 내 몸속에서 호스가 빠져 나갔다. 침대 밑에 나란히 놓인 통3개가 나를 자꾸 끌어 내린 듯한 밤이면 잠도 못 자고 뒤척일 수밖에 없었고 갈비뼈 사이로 연결 돼 있던 호스가 뼈를 자극할 때마다 느껴지던 통증….

흉부관련 환자들만 입원해 있는 그런 건물 이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도 많이 있고 인큐베이터 같은 곳에 넣어진 갓 태어난 신생아도 있었다. 사람마음은 다 같은 건가. 그런 아이를 보면 모두 안타까운 시선으로 빨리 완쾌해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기를 바랬다.

시누이와 동생은 애들이 말을 좀 안 듣고 공부를 좀 못 하면 어쩐가. 그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픈 자식을 둔 부모는 帑窄?내가 아프고 싶다고 했다. 4살쯤 돼 보이는 작은 남자 아이가 보채듯 울고 그 엄마는 안절부절이다.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호스 연결 된 부위가 그렇게 아프냐고. 어른도 아픈데 저렇게 작은 아이가 얼마나 아프겠냐고 대답해 준다. 애는 자지러질 듯 운다. 이런 고통을 벗어나는 해방감. 만세라도 부르고 싶다.

시누이는 자유로워 진 나를 보고 편한 마음으로 시골로 내려갔다. 며칠이 지나 링거 바늘까지 뽑고 나니 정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야호”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병실 밖엔 봄이 절정에 달해 있다. 꽃은 더욱 만발하고 꽃을 떨쳐낸 자리엔 연두색 어린잎이 새색시마냥 부끄러운 듯 살며시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새 초록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화사한 봄빛을 받으며 산책을 해 본다.봄빛은 따사로운 것 같은데 아직 바람은 차갑고 걷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내 심장 속에 들어 앉아 내 몸에 피를 돌게 해줄 인공 판막들이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연습을 시켜야 한다.

7일이 더 지나 17일째가 되던 날 병원 식구들 환송을 받으며 집에 왔다. 어쩜 못 올 수도 있었던 곳은 말없이 나의 귀가를 축하 해 준 듯하다. 나를 아는 이웃사람들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집에 오니 마음은 더 편했지만 혼자서 밥을 챙겨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어디 누구를 돌보며 살 수 있는 생활인가? 그렇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반찬을 해 오고 과일을 사오고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줬다. 미안한 마음에 빨리 먹고 기력을 찾아 스스로 살아보려 욕심을 부린 탓에 퇴원한지 3일 만에 자다가 한 밤중에 응급차를 불러 타고 병원으로 실려 가야 했다.

잠을 자다 깨어보니 웃옷이 물에 젖어 있다. 땀을 흘린 것도 아니고 초저녁에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그 수건을 잘못 두고 잤나 싶어 아무리 찾아 봐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니 방바닥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물. 그 정체를 찾다 난 놀라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호스를 빼고 채 아물지 않은 상태로 퇴원을 했는데 그 곳에서 수돗물이 쏟아지듯 물이 나온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구급차를 불러 타고 응급실에 가서야 알았다. 수술을 하고 나면 수분이 많이 생겨 물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되었다. 그런 자세한 주의 사항도 듣지 않고 퇴원을 해서 무작정 많이 먹으면 되는 줄 알고 사람들이 사온 과일이며 음식들을 많이 먹은 게 화근이었다. 그 후 음식을 먹을 땐 조심을 해야 했고 아침마다 체중을 체크하며 혹시 복수가 차지 않나 세심하게 살피는 생활을 하고 있다. 어려운 고비를 하나하나 넘을 때 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절반이라도 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가시고 어린 생들과 힘든 생활을 하다 보니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갔고 어려움이 닥치면 닥칠수록 마음속에서는 ‘그래 한 번 해보자 누가 이기나’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이런 오만 불손한 마음 때문에 난 더욱 강도 높은 신의 실험을 받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난 더 이상 힘이 없습니다. 내게 고통은 그만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살고 싶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내가 퇴원하고 며칠 후부터 주말에만 집에 왔다. 혼자 하루 종일 누워있다 보니 밤에 잠이 안 올 때가 많았다.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병원에 가기 전에 써 놓은 유서를 꺼내 읽어본다.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에 눈물이 하염없이 났다. 그래서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넣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시골에 계신 시어머님은 매일 전화를 하셨다. 서울에 혼자 있지 말고 시골로 오라고 성화셨다. 이런 몸으로 천리 길을 간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께 물으니 비행기를 타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시댁이 있는 곳 근처 비행장에 내리니 고모부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코끝으로 다가오는 6월의 맑고 싱그러운 공기는 나를 평온하게 해 줬다.

시어머님과 시누이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하루하루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건너편 산꼭대기에 부모님 산소가 있는데 그 쪽을 향해 난 혼자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 미안해요 이 딸을 용서 하세요.’부모님 산소도 찾을 수 없으니 늘 죄인이 된 느낌이었지만 부모님이 이런 내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그러니 다 용서하실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힘겨운 모습으로 시누이집 소파에 앉아 있는데 관상을 볼 줄 안다는 손님이 와서 나를 쳐다보며 하시는 말씀이 “살아가는 동안에 큰 수술을 두 번 해야 되겠네요” 하신다. 난 “고맙습니다.” 깍듯이 인사를 하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니 큰 수술을 한 번도 아니고 그것도 두 번이나 해야 한다는데 고맙다니 저 여자 어디가 잘못 된 건 아닌가’ 하는 표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이 두 번째 수술이었는데 마지막 수술이었다니 앞으론 걱정 없이 살아도 되겠군요.”라고 말했다. “그랬군요. 몸조심하세요.”라며 당부 말을 아끼지 않았다.

병원 가는 날이 다가와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내게 시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며느리 넷을 뒀는데 너만 친정엄마가 안계시니 내 살아있는 동안 친정엄마 노릇을 할란다 . 그러니 어려워 말고 먹고 싶은 것, 필요한 것 있으면 전화해라”

남의 가문에 시집을 왔으면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난 그 도리도 지키지 못했는데도 이렇게 끝없는 사랑을 주시는 어머님께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 이제 몸으로 뭘 한다는 건 불가능하니 내 살아가는 동안 그분을 위해 늘 기도하며 아낌없는 마음을 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의사선생님은 말씀하신다. 다른 장기들은 운동을 하면 할수록 좋아지는데 심장은 쓰면 쓸수록 망가지니 조심 또 조심하라고.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던가? 수술을 받은 지 1년이 됐다.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다. 다 나을 수도 없고 더 나빠지지 않게 조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그렇다고 마냥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세월을 낭비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늘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려고 평소 알고 있던 주부학교에 등록을 했다.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정말 힘이 든다. 학교에 갔다 와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나를 보며 언니는 한마디 한다.

“내년이나 할 것이지 뭐가 바쁘다고 몸도 아직 다 추스리지 못한 채 공부를 하겠다고 야단이냐? 그러다 또 아프면 어쩌려고….”

다른 건 몰라도 공부는 꼭 해보고 싶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꼭 공부를 해야만 남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난 몸으로 남을 도울 수 없으니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꼭 공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께 친구가 되어주고 몸이 아파 절망하는 사람들께는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난 두 번이나 큰 수술을 받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 아직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있음이 분명하다. 난 그 일을 찾아서 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이 생긴다. <세월이 거듭 될수록 사람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잘 다듬어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하기 때문이리라.> 장성숙의 ‘무엇이 사람보다 소중하리’ 중의 한 대목이다. 이글을 보면서 나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이제야 인간의 모습을 막 갖추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삶이 불행하지만은 아닌 것 같다. 아파봤기에 아픈 사람 마음도 헤아릴 수 있고 슬퍼봤기에 슬픈 사람 마음도 다독여 줄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지나 온 내 삶이 밑거름 되어 앞으로 살아 갈 날의 내 모습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지 않을까?

가끔은 밤에 남편과 나란히 누워 이런 말을 한다. 난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러면 그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다시는 당신 안 만날 것이라며 정색을 한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다시 괴롭히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땐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아들 딸 낳아주고 지금 받았던 이 모든 것들을 갚아 주고 싶다고. 그러면 남편은 미안했던지 “당신이 귀찮고 싫어서가 아니라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별 욕심 없이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예전엔 내 욕심 때문에 괴롭고 슬픈 생활로 나를 밀어 넣고 힘들게 살았을 뿐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 했다.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고 텅 빈 내가 되고 보니 비로소 욕심 부리며 살아왔던 지난날의 내 어리석음이 한 없이 불쌍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평온한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남은 인생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아보고 싶다.